흙냄새 묻은 초록 잎사귀

여름은 그 푸름을 먹는다

by현월안




야무지게 먹을 자신도 없으면서 길가 좌판에서 호박잎을 세 묶음이나 샀다. 스물너댓 장씩 묶인 것이 이천 원. 값을 치르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괜히 무거웠다. 세상에는 너무 비싼 것도 많지만, 너무 싸서 미안한 것도 있다.



흙냄새 묻은 초록 잎사귀들이 손에 들려 있는데, 그 가격 안에 들어 있을 시간을 생각한다. 봄날의 씨앗의 시간과 비바람을 견디며 넝쿨을 뻗었던 시간과, 여름 땡볕 아래 햇빛이 담긴 시간들. 그리고 새벽부터 밭에 나가 잎을 따고 다듬고 묶어 좌판에 내놓았을 누군가의 노동까지. 이천 원이라는 금액보다 그 안에 담긴 시간은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 호박잎 뒷등의 질긴 껍질을 한 올 한올을 벗긴다. 손끝에 닿는 까슬한 촉감이 어찌나 정겹던지. 그러다 보면 한 사람에게 닿는다. 종갓집 종부의 삶 엄마다.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여름이 되면 엄마의 부엌은 늘 나물 냄새로 가득했다. 수많은 이름 모를 그 야채를 반찬으로 만드는 마법의 솜씨. 그중에 호박잎은 지천에 있던 흔한 엄마의 식재료였다. 그걸 삶은 호박잎에 강된장을 올려 쌈으로 먹기도 하고 된장국에 넣기도 하고, 갖은양념 넣어 무쳐 내기도 하셨다.



어릴 때 그때는 어른들이 왜 호박잎을 좋아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까끌까끌하고 투박한 잎사귀가 뭐가 그리 맛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시간이 지나고. 그 맛은 맛이기보다 인간적인 맛이었고 또 삶을 이어주는 맛이었다는 것을.



호박잎에는 그 특유의 시골 내음이 들어 있다. 도시의 세련된 맛이 아니라 흙과 바람과 햇볕이 오래 눌어붙은 토종의 맛.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살아낸 시간의 맛. 그리고 엄마의 맛. 그래서 여름이 되면 나는 습관처럼 호박잎을 산다. 그리고 그때 그 맛을.



어느새 강된장이 짜글짜글 끓기 시작한다. 된장 냄새와 청양고추 향이 집안을 채우고 삶아낸 호박잎에서는 여름의 푸른 숨결이 피어오른다. 어느새 식구들과 둘러앉아 커다란 호박잎 위에 밥을 얹고 강된장을 올려 입안 가득 넣는다. 그 순간 나는 그때 그 기억을 먹고 흙을 먹고, 여름을 먹는다. 그리고 오래전 엄마가 차려 주시던 밥상을 함께 먹는다.



철학자 '알베르트'는 생명에 대한 경이를 누구보다 진실하게 말했다. '개미와 풀꽃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신의 존재도 알 수 없다'라고. 했을 만큼. 삶을 지지하는 작고 낮은 버팀목들이 도처에 얼마나 많은지. 소소해서 거룩한 일들이 얼마인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작고 보잘것없는 생명까지 존중하는 마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고.



세상을 지탱하게 하는 것은 작고 낮은 존재들이다. 호박잎 한 장에는 우주의 질서가 숨어 있다. 그걸 알아차리는 의미. 그 평범한 하루 속에서도 작은 존재를 감각하는 일들. 오늘 저녁 밥상에도 또 내일도 푸른 잎 호박잎쌈이다. 또 호박잎을 욕심내어 한 쌈 싸서 입안 가득 담는다. 푸른 여름이 터질 만큼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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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그 푸름을 먹는다. 이천 원짜리 호박잎 세 묶음의 시간. 그때 엄마의 시간을 밥상 위에서 다시 만나는 시간. 그건 삶이 나에게 건네는 푸름의 기억이고 조용히 건네는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