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가 세상이 무너질 듯 퍼부어도 언젠가는
전철을 내려 밖으로 나갔더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 맞아 여름 장마철인데' 깜박하고 우산을 들고 오지 않았다. 하늘은 순식간에 검은 구름을 모아 소나기를 퍼부었다. 우산이 있어도 소용없을 만큼 굵은 빗줄기가 지상을 때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출구 지붕 아래로 몸을 피했다. 비를 피해 모여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시계를 들여다보거나 하늘을 올려다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약속 시간에 늦을까 걱정하는 사람과 우산이 없어 난감해하는 사람, 또 택시를 부르며 연신 한숨을 쉬는 사람까지. 모두가 비 앞에서 잠시 멈춰 서 있었다.
그때 내 옆에 서 계시던 할머니 한 분이 나를 보며. "조금만 더 기다려요." "이 비가 금방 그칠까요?"
할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장마철에는
"소나기 삼 형제"가 있어요. 몇 번 퍼붓고 나면 금세 약해져요. 소나기 삼 형제.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 할머니는 어릴 적부터 어른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라고 했다. 소나기는 한 번 세게 쏟아지고, 또 한 번 몰아치고, 마지막으로 한 차례 더 기세를 부린 뒤 잦아든다고. 오랜 세월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온 사람들의 경험이 쌓여 만들어진 생활의 지혜일 것이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온 터라 할머니 말대로 잠시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 짧은 십분 남짓한 시간 동안 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머니는 올해 여든이라고 했다. 오래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아들 박사이야기 건강 이야기, 젊은 시절 이야기까지. 낯선 사람끼리였지만 빗속에서는 경계가 느슨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비가 사람을 붙잡아 두었기 때문일까. 빨리 가야 한다는 마음을 잠시 내려놓으면 사람은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목적지보다 현재의 시간이 중요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린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처럼 소소한 대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놀랍게도 할머니 말이 맞았다. 조금 전까지 세상을 뒤흔들던 빗줄기가 어느새 가늘어졌다. 거칠게 내리꽂던 빗방울은 어느새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둘 길을 나섰다. 나 역시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목적지를 향했다.
그날 모임을 하는 사람은 모두 여섯 명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모두 소나기 이야기를 했다. 어떤 이는 비를 피해 카페에 들어가 시간을 보냈고, 어떤 이는 흠뻑 젖은 채 도착했다. 또 어떤 이는 비 때문에 지각을 했다며 멋쩍어했다.
그날의 화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나기였다. 인간의 삶도 어쩌면 소나기와 닮았다. 살다 보면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갑자기 닥친다. 계획은 무너지고 당장 끝날 것 같지 않은 고통이 머리 위를 뒤덮는다. 그럴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애쓴다. 하지만 서둘러서 해결되지 않는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기다림이 힘이다.
여름의 소나기는 철학을 가르쳐 준다. 하늘은 영원히 비를 품고 있을 수 없다. 거세게 쏟아지는 순간에도 이미 그침을 향해 가고 있다. 폭우의 한가운데서 인간은 그 진리를 알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삶의 어려움도 어쩌면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다.
여름에 소나기가 세상이 무너질 듯 퍼부어도 언젠가는 가늘어진다. 지금은 앞이 보이지 않아도 어느 순간 구름 사이로 빛이 스며든다. 영원히 계속되는 소나기가 없듯이 영원히 계속되는 고난도 없다. 전철 출구에서 만난 여든 할머니는 아마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소나기 삼 형제'라는 말은 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삶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ㅇ
여름은 해마다 소나기를 데리고 온다. 소나기는 자연이 들려주는 철학이다. 그날 나는 비를 피했고 또 삶의 한 문장을 알았다. 소나기는 세 번 세상을 두드리고 지나간다는 오래된 지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