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넓고 깊은 마음

by쿼카의 하루

어릴 적 지하철은 가끔, 불편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통수단인 것 같았다. 빠른 이동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편리함을 있는 대로 희생한 것 같은 대중교통. 태생부터 지하를 뚫어 만들었다는 점에서 지하철이라는 녀석의 기질을 가늠하게 했다. 괴상하게도 양옆으로 승객들을 마주 보게 만들어진 좌석도 한몫했다. 불편한 사람이 한 명도 타고 있지 않아도 불편했지만, 사람들이 많이 타고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편치 않았다.


지하철에 있노라면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몰랐다. 내가 서 있거나 앉아있는 곳에는 항상 한 사람 이상의 시선이 겹치기 때문이었다. 이십 대 시절에 지하철을 일상적으로 타게 된 나에게는 슬롯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모르는, 모든 게 의문 투성이인 사람이었다.


그 시절 내가 가장 자주 용하는 단어는 '모른다'였다. 혹자는 모른다는 말로 다가서기도 하고, 모른다는 말로 외면하기도 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모른다는 말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나 자신과 멀어졌다. 끊임없이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모른다고 답하곤 했다. 여름이 좋아요, 겨울이 좋아요? 어떤 음악을 좋아해? 몇 시에 잘 거야? 어쩌면 나는 나를 낯설게 함으로써 나와 가까워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더욱 이상적이고 정확한 거리에서 나 자신과 소통하고 싶었던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시도 때도 없이 내가 다른 사람과도 같이 느껴지는 이인증을 경험하기도 했다.


누군가 나에게 지하철이 좋은지, 버스가 좋은지 물어본 적이 있다. 이번에 나는 망설임 없이 버스가 좋다고 답했다. 지하철은 프라이버시가 없는 느낌 같다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다른 지인은 지하철이라 답했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버스보다 지하철을 좋아할 수가 있다고? 더욱이 그가 나처럼 조용하고 낯을 가리는 성격인 것 같아서 그렇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늦은 시간에는 항상 턱수염이 자라 있는 그는 수줍은 듯 웃으며 나의 반응을 되레 신기해했다.


지하철은 사실 편리한 문명의 이기다. 물론 불편한 사람들이 탄다면, 충분히 불편할 수 있는 곳이기는 하다. 이곳에는 술냄새나는 취객, 친하지 않은 지인, 포교하는 종교인 그리고 적선을 요구하는 걸인까지 있다. 백인 남성이 긴 수염을 보여주거나 흑인이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옆사람과 대화 중 웃기도 한다. 그들이 비상식적으로 나에게 접근하거나 말을 걸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혐오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들은 그곳에 있기에 내 시선을 빼앗았다. 나의 시선을 잡아 끈다는 사실이 불편할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도시의 지하에는 지하철이 쉴 새 없이 운행한다. 너른 소나무처럼 변함없는 도시의 품은 낯선 이방인들의 언어들에도 낯을 가리지 않고 맞이해 준다. 그들의 낯선 옷차림과 눈길도 지하철이 오고 가는 소음에 묻혀 점점 눈에 익게 된다. 요즘의 나에게 있어서는 불편한 마음으로 열차에 타도 지하철이라는 공간 안에서는 점점 안심하게 된다. 낯선 이들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신기하고 낯설어할 때는 지하철은 불편한 곳이었다. 그러나 도시의 지하철이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더 이상 그렇지 않았다.


이제야 나는 지하철이라는 공간이 곧 넓은 대도시를 상징하는 곳임을 안다. 그곳에 가면 매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다양하기 때문에 웬만한 독특함은 이해받는다. 많은 소하천들이 모이는 강이 넓고 깊어 수면이 잔잔한 것처럼. 나에게 있었던 돌출된 시선과 사춘기적 감성을 남들에게 투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도시는 넓고 깊은 마음으로 도시에서 자란 나를 받아들여 주었다. 성숙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선택적으로 무관심한 것처럼 말이다. 지하철은 나를 편견 없이 머무르고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애정 어린 공간이었다. 어느 순간에는 무관심으로, 또 어떤 때는 꼭 필요한 도움으로 말이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5화스무살의 걸음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