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큼한 것

초단편소설

by쿼카의 하루

나는 비바람을 헤치고 한참을 걸었다. 그리고는 어떤 고을의 초입으로 보이는 성곽을 발견했다. 입구 안으로 조금 걸으니 우장을 차려입고 걷는 한 사내가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말을 건넸다.


"길 좀 묻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걷고 있던 사내가 갈삿갓을 위로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라는 외부인을 약간 경계하는 눈치였다.


"여기가 서해에 인접한 고을입니까?"


갈삿갓을 들고 있는 손을 내려놓지 않고 조금의 뜸을 들이며 사내는 말했다.


"당신이 풍랑에 날려 오지 않았다면, 바다를 마주치지 않았소?"


의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자세히 보니 그의 미간은 약간 찌푸려져 있었다.


"여기는 동해 강릉이오"


나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사내의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한양에서부터 거의 정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사내에게 꾸벅 인사를 했지만 사내는 의심을 거두지 않은 듯 빠른 걸음으로 나를 지나쳐서 걸었다. 하긴 그의 시선에서 내가 이상해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아무리 못배운 장돌뱅이라 하더라도, 방향 감각이 이렇게나 없을 수가 있을까. 그리고 칠팔월의 궂은 장맛비가 계속 됐다 하더라도, 며칠새 걸으면서 바다를 보지 못했을 리는 없다.


장돌뱅이 주제에 걸으면서 주변도 살피지 않는 모질이가 됐다는 생각에 한숨을 쉬었다. 사실은 나는 이곳 고을까지 오면서 바다를 총 세 번 정도 마주쳤다. 깎아지른 듯한 암석 아래에 깊어 보이는 바다를 보면서도 혹시 이것이 동해가 아닐까 의심하기는 했다. 그러나 나는 보통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바다 빛깔을 구분하지 못한다. 서해는 흐린 옥빛, 동해는 푸른 쪽빛인데도 불구하고 그 명백한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니 나로서는 참 한탄스러운 일이다.


괜스레 서글픈 마음을 애써 잊으며 주막에 들렀다. 혼자 막걸리 한 잔을 하고 주모가 차려준 단출한 저녁상을 드니 해는 모두 떨어져서 어두워졌다. 나는 등과 거의 하나가 되었던 무거운 봇짐을 방에 풀었다. 갑자기 몸이 위로 솟을 것만 같이 홀가분해졌다. 방에서 잠을 자려고 하니 주모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나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주모가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꺼내고 싶은 말이 있지만 주저하는 기색이었다.


"무슨 일이오?"


"다름이 아니라, 오늘 저녁상에 올린 쌀밥 말인데…"


주모의 말을 들어보니, 저녁에 올라온 밥은 주막 마당에 묶어놓고 기르고 있던 누렁이에게 돌아갈 밥이었고, 객에게 주려던 갓 지은 밥이 누렁이에게 갔다는 말이었다. 주모는 솥이 바뀌었다는 것을 깨닫고 너무나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어 지금에서라도 말씀을 드리러 왔다는 것이었다.


"괜찮소. 나는 원래 상하거나 쉰 것을 잘 먹으니까"


"솥이 바뀌었는지 모르고 밥을 먹으려고 한 주걱 떴는데 색이 검게 바래고 냄새만 맡아도 욕지기가 올라왔어요. 아이고 정말 마음이 너무 죄스러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거듭 사과하는 주모 앞에서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사실 내 위장은 웬만한 것에는 끄떡 없소"


주모는 그런 나의 말에도 여전히 근심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잠깐 기다려보라는 말을 하고는, 금색 그릇을 가져와서 내 앞에 내려놓았다.


"이곳 근처에 관가가 있어서, 우연한 계기로 타락(*우유)을 구했는데, 귀한 것인데 한번 잡수어보시라고…"


주모는 그릇에 담겨 있는 걸 두고 타락이라고 했다. 수라상에나 올라올 만큼 귀한 것이라고는 들었던 것 같다. 나는 감사하다고 말하고 주모를 보냈다. 그리고는 묽고 하얀 타락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진귀한 음식이었다. 나는 맛보는 대신 내가 가져온 봇짐을 풀었다. 봇짐에는 크고 작은 장독이 들어있다. 나는 작은 크기의 장독에 타락을 넣고 마개를 닫았다. 아침에 떠날 적에 그릇을 꼭 돌려주겠노라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처음 와본 강릉의 장시는 꽤 성황이었다. 장마가 지난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날씨가 선선하니 돗자리를 펴고 오래 장사를 하고 있기에도 제격이었다. 강릉 바닥에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장시가 열리는 곳 역시 많지 않은 덕택에 파는 장사꾼도 많고 사는 손님들도 많았다. 북적거리는 통에 많은 물건을 팔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고, 수입은 물론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타락이 담긴 장독 주변으로 파리가 꼬여서 쫓느라 애를 먹었다. 사람들 인심이 그래도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장독들을 판 돈으로 집에 혼자 계시는 어머니 약도 지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분이 무척 개운했다.


나는 집으로 오는 길에 저승으로 떠나보낸 아내와 아들을 생각했다. 삼 년 전, 내가 잠시 장을 돌러 멀리 떠나 있던 와중에 집에 도적들이 습격했고 아내와 어린 아들을 죽이고, 귀한 물건들을 가지고 달아났다. 나는 아내와 어린 아들을 항상 그리워했다. 이렇게 산길을 걸을 때가 되면 그들과 함께 산보에 나가고, 아들에게 나무와 풀들의 이름을 알려주던 때가 그리웠다. 아내와 함께 걷고 포옹하고 정답게 백년가약을 하며 이야기하던 뒷산이 생각났다. 그들이 살아있다면 고단한 나그넷길에 더욱 외롭지는 않을 텐데. 나의 아버지도 오랜 병환으로 돌아가시고, 홀어머니만 남아서 어머니를 모시고 산 지도 이제 오래였다. 나는 봇짐을 걸머지고 홀로 밤이나 낮이나 고개를 넘고 길을 걸었다. 장독에 담긴 타락을 보니 시큼한 냄새가 나고 약간 걸쭉해졌다. 몸이 약하신 어머니께 드려도 괜찮을까? 나는 걸쭉해진 타락을 검지로 찍어 약간 맛보았다. 약간은 시큼하지만 맛이 괜찮았다. 오히려 조금 지나니 오랜 갈증 끝에 마신 샘물처럼 기운이 솟는 느낌이었다. 산과 나무들은 숨 쉬듯 내게 기운을 전하고, 새들의 노랫소리가 즐겁고 정다웠다. 왜인지 걸쭉한 타락을 어머니도 좋아하실 것 같다. 나는 흙바닥을 정직하게 한 걸음씩 디디며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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