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페이지를 더 썼는데, 글은 오히려 세 걸음 뒤로 물러났다.
처음에는 많이 쓰는 것이 성실함이라고 생각했다.
-한 문장을 썼으면 그 문장을 설명해야 했다.
-설명을 했으면 사례를 붙였다.
-사례를 붙였으면 혹시 부족할까 봐 하나를 더 붙였다.
그러다 보면 처음에는 한 페이지였던 글이 세 페이지가 되고, 세 페이지였던 글이 열 페이지가 된다. 이상한 일은 그다음에 일어난다. 분명 더 많이 썼는데 읽고 난 뒤 남는 것은 처음 쓴 한 문장뿐이다. 나머지는 어디로 갔을까. 문장 사이에 묻혔다.
# 작가에게 원고는 노동의 기록이다
작가에게 원고의 분량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한 문장을 고치기 위해 한 시간을 보낸 날이 있고, 한 문단을 쓰기 위해 며칠을 고민한 날도 있다. 그래서 원고를 덜어내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다. 삭제 버튼을 누르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든다.
‘이걸 쓰느라 얼마나 오래 걸렸는데.’
문제는 독자가 그 시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독자는 작가가 그 문장을 쓰기 위해 세 시간을 고민했는지, 삼십 분 만에 썼는지 알 수 없다. 알 필요도 없다. 독자가 만나는 것은 노동의 시간이 아니라 완성된 문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글을 판단할 때 작가가 얼마나 많이 썼는지는 중요한 기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반대일 수도 있다. 많이 썼다는 사실이 많이 읽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 분량과 밀도는 같은 말이 아니다
긴 글이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길이 자체를 가치로 착각하는 것이다. 소설은 긴 호흡을 필요로 할 수 있고, 한 권의 논픽션은 충분한 자료와 설명을 요구한다. 연구서라면 더 많은 근거가 필요하다.
그러나 필요한 분량과 불필요한 분량은 전혀 다른 문제다. 한 문장이 다음 문장을 불러내는 글이 있다. 반대로 한 문장이 이미 끝낸 이야기를 다음 문장이 다시 설명하는 글도 있다.
전자는 길어도 지루하지 않다. 후자는 짧아도 길게 느껴진다. 결국 독자가 느끼는 글의 길이는 페이지 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문장이 얼마나 앞으로 나아가느냐가 글의 체감 길이를 결정한다.
# 출판시장은 이미 ‘많이 만든 것’과 ‘팔리는 것’을 구분하고 있다
최근 국내 출판시장만 봐도 이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2025년 출판산업 실태조사에는 2024년 기준 출판사와 유통사의 거래·마케팅 현황뿐 아니라 연간 발행통계와 판매 관련 지표가 함께 담겨 있다. 바카라이 만들어지는 것과 실제 독자에게 선택받는 것은 별개의 단계라는 뜻이다.
출판유통통합전산망의 2025년 8월 판매 데이터도 흥미롭다.
그달 판매 종수는 약 32만 권이었고 판매 부수는 약 884만 부였다. 전월보다 판매 종수와 판매 부수가 각각 감소했지만, 전년 동월과 비교하면 매출액은 2.7% 증가했다. 단순히 ‘얼마나 많은 바카라이 시장에 나왔느냐’만으로 독자의 선택을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더 최근의 2026년 5월 통계에서는 출판유통통합전산망이 교보문고·예스 24·알라딘·영풍문고와 433개 지역서점의 판매 데이터를 종합해 월간 판매 순위를 발표하고 있다. 결국 바카라의 존재를 결정하는 마지막 숫자는 원고의 페이지 수가 아니라 독자가 실제로 집어 든 횟수에 가깝다.
여기서 작가가 배워야 할 것은 단순하다. 많이 만드는 능력과 선택받는 글을 만드는 능력은 다르다.
# 국내 사례가 보여주는 의외의 사실
온라인카지노에서 출발해 바카라이 된 작품들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제9회 온라인카지노북 대상작 『콜센터의 말』의 원작은 처음부터 출간을 목표로 만들어진 원고가 아니었다. 이예은 작가는 인터뷰에서 원작이 약 3만 자였다고 말했다. 이후 대상 수상과 출간 과정에서 제목과 목차를 새롭게 구성하고 7만 자 이상을 추가했다.
이 사례는 얼핏 보면 ‘많이 써야 바카라이 된다’는 증거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핵심은 다른 곳에 있다. 분량을 늘린 것이 아니라 바카라이라는 형식에 맞게 다시 구성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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