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게 키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이에게 자유를 주면 아이는 정말 잘 자랄까?
이 질문을 자주 받는다.
특히 내가 셋째 아들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다고 하면 더 그렇다.
"그럼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게 놔두는 건가요?"
나는 그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렵다. 자유롭게 키우는 것과 방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자유를 준다는 말을 우리는 자주 오해한다.
게임을 해도 되고, 공부를 안 해도 되고, 학교를 안 가도 되고, 밤새 놀아도 되는 것.
그것을 자유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것은 자유라기보다 충동에 맡겨진 상태에 가깝다. 자유에는 선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선택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른다.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지만, 그 선택의 결과까지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자유에는 바카라임이 따라온다.
나는 아들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부하지 않았을 때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는 이야기했다. 성적이 떨어질 것이다. 좋은 대학에 가기 어려워질 것이다. 고등학교 선택의 폭이 좁아질 수 있다. 나중에 다시 공부하려면 훨씬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이것을 숨기지 않았다. 다만 그 결과를 말한 뒤, 최종 선택은 아이에게 맡겼다.
부모는 아이보다 세상을 더 오래 살았다. 그래서 더 많이 안다. 어떤 선택이 위험한지도 알고, 어떤 길이 현실적으로 어려운지도 안다. 그러다 보니 아이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을 보면 참기 어렵다.
"그건 하지 마." "그렇게 하면 안 돼." "내가 다 해봐서 아는데."
부모에게는 너무 자연스러운 말이다. 나 역시 수없이 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부모가 계속 아이 대신 선택하다 보면, 아이는 선택하는 능력을 배우지 못한다. 어릴 때는 부모가 정답을 알려준다. 조금 크면 부모가 방향을 정해준다. 대학을 정해주고, 전공을 정해주고, 취업할 온라인 게임을 정해주고, 결혼할 사람까지 걱정한다. 그러다 어느 날 아이가 성인이 된다. 그리고 부모는 묻는다.
"너는 왜 자기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지 못하니?"
어쩌면 이상한 일이다. 선택할 기회를 주지 않고 선택하는 능력을 기대하는 것이다.
아들에게 거창한 선택을 맡긴 것은 아니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하면 배우게 했다. 복싱을 하고 싶다고 하면 배우게 했다. 친구들과 놀고 싶으면 놀게 했다. 중고거래를 해보고 싶으면 해보게 했다. 주식을 해보고 싶다고 하면 일정한 범위 안에서 해보게 했다. 물론 결과는 달랐다.
돈을 벌기도 했고, 잃기도 했다. 잘되기도 했고, 실패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과정 자체를 중요하게 봤다.
선택 → 경험 → 결과 → 다시 선택.
이 과정을 반복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 자기 삶을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훈련인지도 모른다.
부모는 아이가 실패하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시험을 망치면 대신 학원을 알아본다. 친구와 문제가 생기면 대신 해결해준다. 돈을 잃으면 다시 채워준다. 진로를 잘못 선택할 것 같으면 미리 막는다.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다.
그런데 아이가 실패할 기회를 모두 제거해 버리면, 아이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실패하지 않는 능력이 아니라 실패를 감당하지 못하는 능력일 수 있다. 세상은 아이가 성인이 되었다고 실패를 대신 바카라임져주지 않는다. 오히려 부모가 보호해주던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순간, 선택의 결과를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그렇다면 부모가 아이에게 해줘야 할 것은 실패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경험을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들은 작년에 중고 물품을 사고팔며 약 100만 원을 벌었다. 올해는 그 돈으로 주식을 했다. 그리고 거의 다 잃었다. 내가 주식 경험이 없었다면 모르겠지만, 나는 주식의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처음부터 하지 못하게 막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정한 범위 안에서 해보게 했다. 그리고 결과를 지켜봤다. 돈을 잃었다. 아들에게는 분명 아픈 경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경험을 실패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돈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욕심이 어떤 결과를 만드는지, 손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자기가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경험 하나로 아이가 현명한 투자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바카라에서 읽은 실패와 자기 돈으로 경험한 실패는 다르다.
그렇다고 모든 선택을 무조건 존중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부모는 현실을 알려줘야 한다.
"네가 그 선택을 하면 이런 결과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
"이 길을 가려면 이런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을 선택하면 저것은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이런 이야기는 부모가 해줘야 한다. 나는 이것을 선택의 조건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건을 알려주는 것과 선택을 대신하는 것은 다르다. 부모가 할 일은 선택지마다 무엇이 따라오는지 정확히 알려주는 것이다. 이 선택은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저 선택은 어떤 위험이 있는지, 어디서부터는 되돌리기 어려운지 알려줄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아이가 결정해야 한다.
여기서 다시 공부 이야기로 돌아온다. 나는 여전히 공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27년 동안 수학을 가르친 사람이 공부의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다. 문제는 공부를 무엇을 위해 하느냐이다.
살아남기 위해서인가. 남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인가. 부모를 만족시키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얻기 위해서인가.
같은 세 시간의 공부라도 그 이유가 다르면 완전히 다른 공부가 된다. 아들에게도 나는 공부를 포기하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반고에 가겠다면 현실적으로 필요한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학에 가고 싶다면 공부가 필요하다. 수리논술을 생각한다면 수학을 해야 한다. 지금 조금씩 수학을 하고 있다. 목표한 세 시간에는 아직 못 미치지만, 나는 조급해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시켜서 하는 세 시간보다, 스스로 시작한 한 시간이 더 중요한 순간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언젠가는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 역시 아이의 몫이다.
선택모드는 바카라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생존모드에서 벗어나자는 말을 하면 현실을 무시하고 살자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반대다. 생존모드에서는 두려움 때문에 선택한다.
"망하면 어떡하지."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뒤처지면 어떡하지."
그래서 안전해 보이는 길을 붙잡는다.
선택모드에서는 현실을 본다. 그리고 묻는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이 선택의 결과를 감당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한번 해볼 것인가?"
이것이 선택모드다.
우리는 아이에게 자꾸 정답을 알려주려고 한다.
어느 대학에 가야 하는지,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 어떤 직업이 좋은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지만 AI 시대에는 정답이 더 빨리 바뀔 것이다. 오늘 좋은 직업이 10년 뒤에도 좋은 직업이라는 보장은 없다. 오늘 유망한 전공이 20년 뒤에도 유망하다는 보장도 없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하나의 정답을 주는 교육보다, 정답이 바뀌었을 때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교육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나는 아들에게 완벽한 미래를 만들어주고 싶지 않다.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대신 스스로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 실패하면 다시 일어나고,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을 찾고, 필요하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자신의 선택에 바카라임질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라면 내가 모든 미래를 예측하지 않아도 괜찮다.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어쩌면 정답이 아니라 선택권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선택권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자유뿐 아니라 바카라임도 필요하다. 나는 이제 아이를 내가 원하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기보다,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
생존모드에서 선택모드로.
그 전환은 아이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부모인 나부터 시작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