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의 법칙을 따르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게임을 해왔다. 좋은 대학에 간다. 좋은 온라인 게임에 들어간다. 돈을 많이 번다. 집을 산다. 투자를 한다. 경제적 자유를 얻는다. 그리고 마침내 행복해진다. 사람들은 이것을 삶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정말 삶일까?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같은 게임에 접속해 있는 것은 아닐까?
학교에 들어가면 성적표를 받는다. 아이들은 서로 비교된다.
몇 등인지, 몇 점인지, 어느 대학에 갈 수 있는지.
대학에 가면 다시 경쟁한다.
어디에 취업했는지, 연봉이 얼마인지, 어떤 회사에 다니는지.
온라인 게임에 들어가면 또 비교한다.
누가 승진했는지, 누가 더 벌었는지, 누가 더 좋은 집에 사는지.
그러다 어느 순간 재테크를 시작한다.
주식, 부동산, 코인, ETF, 절약, 파이프라인, 경제적 자유.
그리고 또 다른 게임이 시작된다.
얼마를 벌었는가. 얼마를 모았는가. 언제 경제적 자유를 얻는가.
이제는 유튜브와 SNS까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렇게 하면 부자가 됩니다." "이렇게 하면 성공합니다." "이렇게 하면 인생을 바꿀 수 있습니다."
심지어 마음까지 자본주의의 언어로 바뀌었다.
끌어당김의 법칙. 성공 마인드. 부자 마인드. 목표 설정. 성공 습관. 아침 루틴. 시간 관리.
우리는 잠자는 시간까지 관리한다.
더 효율적으로 살기 위해. 더 빨리 성공하기 위해. 더 많이 벌기 위해.
그리고 그 모든 끝에 행복이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나는 가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언제 행복할 것인가?
대학에 가면. 취업하면. 연봉이 오르면. 집을 사면. 주식이 오르면. 월급 외 수입이 생기면. 경제적 자유를 얻으면. 그때까지는 행복하면 안 되는 것일까?
나는 아이가 이 게임에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아이가 꼭 이 게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명문대에 가지 않아도 된다. 대기업에 가지 않아도 된다. 높은 연봉을 받지 않아도 된다. 남들보다 많은 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 좋은 아파트에 살지 않아도 된다. 경제적 자유를 이루지 않아도 된다. 그런 것들을 이루면 좋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행복의 조건은 아니다.
나는 아들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공부가 쓸모없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AI 시대에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서도 아니다. 특성화고가 취업에 유리할 것 같아서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단순한 이유였다.
나는 아이가 자기 인생을 남이 만들어놓은 성공의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았으면 했다. 공부를 잘해야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돈을 많이 벌어야 성공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남보다 앞서야 잘 사는 것도 아니다. 그냥 살아도 된다.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도 된다. 친구들과 놀아도 된다. 피아노를 쳐도 된다. 복싱을 해도 된다. 산에 가도 된다. 유튜브를 봐도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이 있어도 된다. 그리고 어느 날 무언가 해보고 싶어지면 그때 시작해도 된다.
우리가 생존모드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현재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부족하다. 그래서 미래를 준비한다. 미래의 내가 더 나아지면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미래의 나는 또 미래를 준비한다. 이렇게 행복은 계속 연기된다. 나는 이것을 뒤집어보고 싶다.
지금 행복하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돈이 많아야 행복한가. 명문대를 나와야 행복한가. 성공해야 행복한가. 누군가 나보다 잘살면 나는 불행해야 하는가.
그럴 이유는 없다.
아이와 친구들이 밤에 공원에 앉아 이야기하는 것.
주말 새벽에 친구들과 산에 올라가는 것.
피아노를 치는 것. 복싱을 배우는 것.
그 순간 아이가 즐겁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우리는 자꾸 묻는다.
"그게 나중에 뭐가 되는데?"
나는 그 질문을 조금 내려놓고 싶다. 그냥 지금 좋으면 되는 것 아닌가.
우리는 아이의 삶까지 프로젝트로 만든다. 초등학교 때부터 계획한다. 중학교에서는 이것을 해야 하고, 고등학교에서는 저것을 해야 하고, 대학에서는 스펙을 쌓아야 하고, 취업하면 경력을 만들어야 한다.
마치 인간이 하나의 상품인 것처럼.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온라인 게임. 더 높은 연봉. 더 좋은 집. 더 많은 자산.
계속 업그레이드한다. 그런데 그렇게 업그레이드한 끝에 정작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잊어버린다. 나는 아이가 성공한 사람이 되기보다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오늘 무엇을 할지 조금 설레는 사람.
친구를 만나 웃을 수 있는 사람.
새로운 것을 발견하면 궁금해하는 사람.
실패하면 속상해하고, 다시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사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오후에도 죄바카라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
나는 그런 삶도 충분히 좋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AI를 단순히 직업의 문제로 보고 싶지 않다.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얼마나 빼앗을 것인가. 어떤 직업이 살아남을 것인가. 무슨 공부를 해야 하는가.
물론 중요한 질문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만약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이 질문은 생각보다 무섭다. 우리는 평생 일하기 위해 교육받았다. 돈을 벌기 위해 일하고,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을 팔고, 그 돈으로 다시 삶을 유지한다. 그런데 AI가 인간의 노동을 점점 대신한다면, 우리가 잃게 되는 것은 일자리만이 아니다. 어쩌면 '일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는 오래된 믿음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처음으로 질문해야 한다.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
나는 아들에게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가난보다, 가난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 나는 가난했기 때문에 열심히 살았다. 그 덕분에 많은 것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몸에 밴 두려움도 함께 가져왔다. 돈이 없으면 불안했다. 미래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했다. 계속 일해야 안심이 됐다. 쉬면 뒤처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똑같이 말하고 싶지 않다.
"너도 나처럼 열심히 살아라."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처럼 살지 않아도 된다."
돈을 벌어도 된다. 성공해도 된다. 명문대에 가도 된다. 좋은 온라인 게임을 가져도 된다. 하지만 그것을 행복의 조건으로 만들지는 말자. 돈이 많으면 더 많은 것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명문대에 가면 더 많은 기회가 생길 수 있을 뿐이다. 좋은 직업을 가지면 더 편하게 살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삶의 가치까지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생존모드에서 선택모드로 간다는 것은 더 좋은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다. 게임 안에서 더 잘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게임을 멈추고 이렇게 묻는 것이다.
"나는 정말 이 게임을 하고 싶은가?"
남들이 모두 대학을 간다고 해서 나도 가야 하는가.
남들이 모두 부동산을 산다고 해서 나도 사야 하는가.
남들이 모두 경제적 자유를 꿈꾼다고 해서 나도 그래야 하는가.
남들이 성공이라고 부르는 것을 나도 성공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그 질문을 던지는 순간, 처음으로 선택이 시작된다. 아들이 일반고를 가겠다고 하면 갈 수 있다. 특성화고를 가겠다고 하면 그것도 괜찮다. 대학을 가고 싶으면 공부하면 된다. 대학에 가지 않겠다면 다른 길을 찾으면 된다. 전기를 배우고 싶다면 배우면 된다. 피아노를 치고 싶다면 쳐도 된다. 친구들과 산에 가고 싶다면 가면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면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 삶이 남들이 말하는 성공과 다르더라도 괜찮다. 삶은 남에게 증명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니까.
나는 이제 아이에게 묻고 싶다.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싶니?"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을 하고 싶다.
"지금 네 삶은 재미있니?"
나는 이것으로 충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않아도 된다. 미래를 준비하면서 현재를 살아도 된다. 돈을 벌면서 행복할 수도 있고, 돈이 많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 성공할 수도 있고, 성공하지 않아도 괜찮다. 삶은 성공해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삶의 한가운데에 있다. 그러니 조금 설레어도 된다. 조금 게을러도 된다. 남들보다 늦어도 된다. 다른 길로 가도 된다.
게임의 법칙을 따르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 어쩌면 진짜 선택은 게임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