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셋째 아들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은 이유
1편에서 나는 생존모드에 대해 이야기했다. 생존모드의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 안에는 자신의 불안도 함께 들어 있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런데 몇 년 전, 셋째 아들이 내 오래된 믿음을 흔드는 말을 했다.
"아빠, 공부하기 싫어요."
그 순간 내 안에서는 두 사람이 동시에 말을 했다.
한 사람은 27년째 수학을 가르치는 학원 원장이었다.
"지금 포기하면 안 된다."
"중학교 때 놓치면 고등학교는 더 힘들다."
"공부는 습관이다."
"지금 안 하면 평생 후회한다."
그 말들은 모두 틀리지 않았다.
다른 한 사람은 조용히 이런 질문을 던졌다.
정말 그럴까?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지 않을까?
나는 오래 고민했다. 공부는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능력은 어릴 때 잃어버리면 다시 찾기 어렵다.
많은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는 이유는 공부가 좋아서가 아니다. 공부 말고는 선택권이 없기 때문이다. 학교를 가고, 학원을 가고, 숙제를 하고, 시험을 본다. 하루 대부분이 이미 정해져 있다. 아이는 선택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택당하는 사람이 된다.
나는 아들이 그런 삶을 살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무모해 보이는 선택을 했다.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다.
내 직업이 수학 강사인데, 내 아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알면 뭐라고 할까?
'공부법 바카라을 쓰는 사람이 자기 아들은 공부를 안 시키네.'
'결국 실패한 교육 아니야?'
하지만 결국 남들의 시선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남았다.
이 아이는 누구의 삶을 살아야 하는가?
내 삶인가?
아니면 자기 삶인가?
시간은 흘렀다. 아들은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이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먼저 성적부터 말하겠다. 예상대로 계속 떨어졌다. 공부를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기적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많은 부모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이 게임이다.
공부를 안 시키면 게임만 하지 않을까?
초반에는 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평일에는 거의 하지 않았다. 주말에 친구들과 PC방에서 하는 정도였다. 게임은 금지했을 때보다 자유를 주었을 때 오히려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공부를 안 하는 대신 아이는 자기 삶을 살기 시작했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 배웠다. 복싱도 시작했다. 친구들과 새벽에 등산을 가기도 하고, 밤에 공원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작년에는 중고거래를 하며 백만 원 정도를 벌었다. 올해는 그 돈으로 주식을 했다가 거의 다 잃었다.
나는 일부러 막지 않았다. 백만 원을 잃은 경험은, 어쩌면 평생 투자에서 수천만 원을 잃지 않게 해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공도 경험했고, 실패도 경험했다. 둘 다 학교에서는 가르쳐 주지 않는 것들이었다.
물론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이것을 성공적인 교육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들의 선택이 훗날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고, 힘든 시간을 겪을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 삶은 적어도 내가 대신 살아주는 삶은 아니다.
이제 고등학교를 선택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나는 특성화고를 추천했다.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수학 선생님이 왜 특성화고를 권하느냐고. 그 이유는 다음 글에서 이야기하려 한다. 그 선택 역시 단순히 진학의 문제가 아니라, AI 시대에 생존이 아니라 선택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모는 아이를 보호할 수 있다. 가르칠 수도 있다. 도와줄 수도 있다. 하지만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언젠가는 부모의 손을 놓고, 자기 삶을 선택해야 한다.
그렇다면 부모는 언제 손을 놓아야 할까?
그리고 어디까지가 자유이고, 어디부터가 방임일까?
그 질문이 나를 다음 선택으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