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길일이다

- “어머니, 내년에도 또 와요.”라고 말했던 날

by진공

“어머니, 내년에도 또 와요.”


오래전 경주 불국사를 다녀오는 길에 내가 한 말이다. 그때는 아무런 무게도 없는 약속이었다. 올해가 가면 내년이 오는 것처럼, 마음만 먹으면 다시 어머니를 모시고 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 해는 실제로 왔다. 어머니와 함께 다시 불국사에 갈 수 있는 시간은 오지 않았다.


사업이 잘되던 시절이었다. 불심이 깊었던 어머니를 모시고 가족들과 경주에 갔다. 절을 좋아하시는 어머니와 불국사를 둘러보았다. 그날 어디에서 오래 머물렀는지, 어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이제 또렷하지 않다. 돌아오는 길에 내가 건넨 말만 이상하리만큼 선명하다.


“어머니, 내년에도 또 와요.”


다시 오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었다. 어머니와 또 여행할 생각이 없었다면 그런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 말을 하면서 내년의 어머니와 내년의 내가 지금과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시간은 충분할 것 같았다. 일을 조금 더 정리하고 여유가 생기면 다시 오면 된다고 여겼다. 미래의 나는 이상하게도 지금보다 늘 한가하고 돈도 넉넉한 사람이었다. 만나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중요한 약속을 참 잘 맡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의 치매가 심해졌다. 함께 여행하는 일이 어려워졌고, 어머니는 오랜 시간을 요양병원에서 보내셨다. 경주 여행은 결국 어머니와 함께한 마지막 여행이 되었다.


그날은 마지막이라는 표시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함께 절을 둘러보고 있다는 생각도, 이 길을 다시 오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여행의 세부보다 다음을 약속한 말이 더 오래 남았다.


나중에야 자꾸 그날을 되짚었다. 조금 더 오래 곁에서 걸을걸. 말씀을 더 잘 들어 둘걸. 사진에 남지 않은 표정도 기억해 둘걸. 이미 지나간 하루에 뒤늦게 할 일을 보태곤 했다.


그렇다고 그때의 내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행을 더 서둘렀다면 모든 후회가 없어졌으리라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당연히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내가 한 약속에는 어머니가 필요했다. 내 시간과 형편만 마련하면 되는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도 먼 길을 다녀올 수 있어야 했고, 함께 걸으며 하루를 보낼 수 있어야 했다. 나는 그 조건들이 그대로 남아 있으리라 여겼다.

약속은 내 입에서 나왔지만, 약속을 이룰 시간까지 내 것은 아니었다.


몇 년 뒤 요양병원 주방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이름표를 확인하고 환자들의 식사를 준비했다. 누가 어떤 음식을 드시는지, 국은 얼마나 필요한지, 반찬은 어떤 형태로 나가야 하는지 익혔다.


처음에는 그날의 식사를 정확히 보내는 일이 전부였다. 오래 일하자 익숙한 이름마다 작은 기억이 생겼다. 국을 넉넉히 달라던 말, 식판을 받으며 건네던 인사, 나를 보고 손을 흔들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다 어느 날 더는 식사를 준비하지 않게 되는 분들이 있었다. 퇴원하거나 병원을 옮기는 분도 있었고, 식사 방식이 바뀌는 분도 있었다.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다. 주방의 반복 속에서도 같은 사람에게 같은 방식으로 한 끼를 보낼 수 있는 시간은 계속 달라지고 있었다.


그럴 때면 경주에서 돌아오던 길이 생각났다.


어머니에게 약속했던 내년이 떠올랐다.


지금 건넬 수 있는 식사와 인사를 너무 오래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려 한다.


내일도 그분이 같은 자리에 계시고, 나도 식판을 들고 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나 오늘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꼭 그 내일에 맡겨야 할 이유는 없다.


인사를 받았으면 눈을 맞추고 답하는 일. 들은 부탁을 잊지 않고 챙기는 일. 정해진 식이에 맞춰 한 끼를 준비하는 일. 특별히 좋은 날을 골라야 가능한 일은 아니다. 바쁜 날에도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된다.


어머니와의 여행을 생각하면 여전히 아쉽다. 그 아쉬움을 교훈 하나로 말끔히 정리할 수는 없다. 지금 다른 사람에게 잘한다고 해서 어머니와 다시 불국사에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그 기억이 오늘의 약속을 조금 바꿀 수는 있다. 언젠가 만나자는 말을 할 때 정말 시간을 낼 생각이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고맙다는 마음을 다음으로 넘기려 할 때 지금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지 묻게 한다.


모든 일을 오늘 끝내겠다는 뜻은 아니다. 다음을 기약해야 하는 일도 많다. 다만 다음이라는 말이 계획인지, 오늘의 수고를 피하려는 말인지 나 자신에게는 솔직하고 싶다.


예전에는 좋은 날을 기다렸다. 일이 덜 바쁘고 형편이 넉넉하며 마음에도 여유가 생긴 날이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날을 기다리는 동안 곁에 있는 사람의 시간도 함께 흐른다는 사실을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다.

어머니와 불국사에 갔던 날도 모든 조건이 완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함께 갔다. 그 하루가 있었기에 지금 내게는 다시 오자고 말했던 기억이라도 남아 있다.


어쩌면 소중한 것은 끝내 오지 않은 다음 여행만이 아니다. 실제로 함께 다녀왔던 그 하루도 있다. 후회 때문에 그날의 시간을 잃고 싶지는 않다.


오늘 아침에도 이름표를 식판 위에 올려놓는다. 지금 이 한 끼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병동에서 만나면 인사를 건넬 수 있는 사람도 있다.


어머니와 다시 불국사에 갈 내년은 오지 않았다. 그 약속을 되돌릴 수는 없다.


대신 아직 곁에 있는 사람에게 건넬 오늘을 다음이라는 말 속에 오래 넣어 두지는 않으려 한다.


내가 무엇인가 건넬 수 있고, 그 사람이 받아 줄 수 있는 날.


오늘이 그런 날이라면, 오늘이 길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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