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질할 줄 알아요?”

- 첫날, 그렇게 시작됐다

by진공

2022년 12월 19일.


날짜만 떠올려도 그날 새벽의 냉기가 먼저 생각난다. 새벽 다섯 시, 가족들이 잠든 집을 나섰다. 노트북과 등산복을 넣은 가방을 메고 어둠 속을 걸었다. 오후 늦게 학원으로 출근하던 내가 그날은 해가 뜨기도 전에 전혀 다른 일터로 향하고 있었다.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곳에서 어떤 삶을 만나게 될지는 알지 못했다.


지하철역에 도착하니 5시 14분이었다. 노포행 첫차가 막 들어오고 있었다. 첫차는 텅 비어 있을 줄 알았다. 문이 열리자 예상은 빗나갔다.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사람, 작업복 차림으로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가방을 고쳐 멨다. 그들에게 익숙할 이 시간이 내게는 낯설었다. 어딘가 잘못 탄 사람처럼 어색했다.


범일역에서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도 거리는 여전히 어두웠다. 여섯 시까지 일터에 도착해야 했는데 첫 버스를 기다려서는 제시간에 갈 수 없었다. 잠깐 망설이다 택시 문을 열었다.


5천6백 원.


그 돈이 유난히 아까웠다. 술값에는 별생각 없이 돈을 쓰면서 출근길 택시비에는 마음이 먼저 움찔했다. 첫 출근부터 늦을 수는 없었다. 택시는 가파른 언덕을 올라 산 중턱의 건물 앞에 멈췄다. 차가운 바깥 공기를 뒤로하고 지하로 내려갔다.


문 하나를 열었다.


뜨거웠다.


세 군데의 스테인리스 작업대 위에는 하얀 식판이 두 줄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식판마다 색이 다른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그 너머 조리실에서는 화구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죽솥에서는 하얀 기포가 터지고, 커다란 국솥에서는 김이 쉼 없이 솟구쳤다. 대형 밥솥의 압력추가 증기를 뿜으며 흔들렸다. 김과 양념 냄새, 빠르게 오가는 사람들, 짧은 지시, 후드의 굉음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요양병원 주방이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빨랐다. 말도 짧았고 손도 빨랐다. 누군가의 한 끼를 정해진 시간에 내보내기 위해 사람들은 이미 자기 자리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학원에서는 내가 설명을 시작해야 수업이 시작되었다. 이곳의 아침은 내가 일을 익힐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처음 건넨 인사는 후드 소리에 묻혔다.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다시 인사하자 일하던 여사님들이 잠깐 고개를 돌렸다. 그중 가장 오래 일한 사람처럼 보이는 분이 나를 보며 물었다.


“칼질할 줄 알아요?”


말문이 막혔다. 수학 문제라면 어떻게든 풀이의 실마리를 찾아 설명할 자신이 있었다. 칼질은 달랐다. 집 부엌 말고는 칼을 제대로 잡아본 적도 거의 없었다.


“할 줄 모르는데요.”


그때는 솔직하게 대답했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주방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들어선 사람의 대답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그날 조리사는 간호 이사에게 따져 물었다고 했다. 아무리 사람이 없어도 그렇지, 일을 전혀 모르는 사람을 왜 데려왔느냐고. 틀린 말도 아니었다.


동료들이 처음 나를 조금 멀리한 데에는 또 다른 사정도 있었다. 훗날 들은 이야기다. 간호 이사가 자기 선배를 직접 데려왔다는 말이 돌았고, 하필 내 성이 원장과 같고 이름도 한 글자만 달랐다.


“원장 동생이래.”


그런 소문까지 붙었다고 했다. 칼질도 못하는 신참에게는 꽤 든든한 배경이 생긴 셈이었다. 동료들 눈에는 일을 전혀 모르면서도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가 설명되었을 것이다. 정작 나는 그런 소문이 도는 줄도 모른 채 다른 사람의 손만 훔쳐보고 있었다.


칼을 잡는 법도, 채소를 다듬는 순서도 낯설었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몰라 주변의 움직임을 따라 했다. 잠시 뒤 반찬을 담은 종지를 하얀 식판 위에 올려놓았다.


“거기엔 일반 김치 놓으면 안 돼요. 다진 김치 놓아야 해요.”


손이 멈췄다. 일반 김치와 다진 김치를 왜 따로 놓아야 하는지도 몰랐고, 조금 전부터 눈에 들어오던 색깔별 이름표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주변에서는 손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는데 내 손만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종지 하나를 옮기는 일에도 내가 모르는 순서와 구별이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모르면 물었다. 다른 사람의 손을 보고 따라 했다. 틀리면 다시 했다. 그날 나는 칼질도 할 줄 몰랐고 김치 한 종지도 제자리에 놓지 못했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국솥 앞에서 국자를 들고, 식판에 빠진 밥과 국이 없는지 살핀다. 한때 다른 사람의 손을 훔쳐보며 배우던 일을 내 손이 하고 있다


2022년 12월 19일, 산 중턱의 병원 지하. 후드가 요란하게 돌아가던 주방에서 누군가가 내게 물었다.


“칼질할 줄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