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자주 의학에 대해 불신을 표명한다. 특히 노환으로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병과 죽음을 묘사하거나 회상하는 장면에서 그 불신은 두드러진다. 소설 속 화자에게 의학은 정확한 학문이 아니었다.
그런데 프루스트의 아버지는 저명한 외과의사였다. 의학에 대한 불신은 혹시 아버지 권위에 대한 반발에서 온 걸까? 아니면 모든 기존 지식에 대한 비판 의식의 발현일까?
프루스트에게 의학은 아주 흥미로운 대상이다. 왜냐하면 의학은 바로 자신의 아버지와 가장 가까이 연결된 지식의 형태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내면과 욕망을 객관적으로 설명한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근대 과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루스트의 의학 비판은 단순히 “의학은 틀렸다”는 과학 비판이 아니다. 아버지의 의학적 권위에 대한 미묘한 반발은 ‘더 넓게 확립된 지식과 권위’에 대한 회의로 확대된다.
프루스트에게 아버지는 단순한 아버지가 아니라 ‘권위’ 그 자체였다. 프루스트의 아버지 아드리엥 프루스트(Adrien Proust)는 당시 상당히 명망 있는 의사였다. 특히 전염병과 공중위생 분야에서 권위를 인정받은 인물이었다. 프루스트가 성장한 가정에서는 의학적 판단과 건강에 관한 아버지의 권위가 상당히 강력했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프루스트 자신이 평생 질병, 증상, 의사, 치료, 건강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점이다. 즉, 아버지가 인간의 몸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이라면, 아들은 인간의 몸과 마음이 그렇게 쉽게 설명될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묻는 사람이 된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적인 의미에서의 단순한 ‘아버지 반항’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오히려 아버지가 대표하는 합리적·과학적 권위에 대한 문학적 반론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프루스트가 의학을 불신하는 핵심 이유는 ‘인간은 증상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의사는 흔히 인간을 질병의 사례(case)로 본다. 그러나 프루스트에게 인간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가령 어떤 사람이 불면증을 앓는다고 하자. 의사는 그것을 생리적 원인, 신경계, 생활 습관 등의 문제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프루스트는 묻는다. “그 불면증을 만들어낸 사랑, 질투, 불안, 기억, 욕망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이 프루스트의 핵심이다. 의학은 원인을 찾으려고 하지만, 문학은 그 증상이 한 인간의 삶 전체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탐색한다. 그래서 프루스트에게 질병은 단순한 생리적 장애가 아니라 때로는 인간의 진실을 드러내는 통로가 된다.
이것은 의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문지식’ 일반에 대한 불신이다. 프루스트는 의학뿐 아니라 사랑, 예술, 슬롯, 귀족, 정치, 철학, 종교, 도덕에 관해서도 전문가들이 만들어 놓은 확실한 설명을 끊임없이 의심한다. 예를 들어 『소돔과 고모라』에서 동성애를 생각해 보자. 당시의 의학·정신의학적 담론은 동성애를 상당 부분 분류하고 명명하고 병리화하려고 했다. 그런데 프루스트는 그 분류 체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복잡하게 변하고 서로 침투하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의학은 인간을 분류하지만, 프루스트는 분류된 인간을 다시 살아 있는 인간으로 돌려놓는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그래서 프루스트의 의학 비판에는 매우 근본적인 ‘인식론적 회의’가 있다. 프루스트의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인간의 진실인가?” 의사는 질병을 안다고 생각한다. 연애하는 사람은 사랑을 안다고 생각한다. 사교계 사람은 사람의 신분과 가치를 안다고 생각한다.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프루스트의 소설은 계속해서 그것을 뒤집는다. 화자가 사람을 관찰할 때마다 자신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 나중에 알게 되는 사실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생긴다. 이 점에서 의학에 대한 불신은 프루스트의 전체적인 인식론과 연결된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 역설이 있다. 프루스트는 의학을 불신하면서도 의학적 사고를 굉장히 많이 사용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다 보면 프루스트는 거의 인간 심리의 임상 관찰자처럼 행동한다. 질투의 증상을 분석하고, 사랑의 증상을 분석하고, 거짓말의 증상을 분석하고, 속물근성의 증상을 분석하고, 동성애적 욕망의 증상을 분석한다. 심지어 인물들을 거의 환자처럼 관찰한다. 따라서 프루스트는 “의학을 거부한다기보다는, 의학의 관찰법을 빌려 인간을 관찰하면서도 의학의 인간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대비해 보면 더욱 흥미롭다. 아드리앵 프루스트는 인간을 과학적으로 이해한다, 질병을 분류한다, 원인을 발견한다, 치료한다, 인간의 몸을 객관화한다. 그러나 마르셀 프루스트는 정말 인간이 그렇게 객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질병 뒤에 욕망과 기억이 있지 않은가? 인간의 행동에는 의식되지 않은 동기가 있지 않은가? 동일한 증상이라도 사람마다 의미가 다르지 않은가?라고 질문한다. 결국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은 인간을 설명하거나 증명하지 않고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발견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렇게 보면 프루스트의 문학은 어느 의미에서 아버지의 의학에 대한 거대한 문학적 반론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이것을 전기적 원인으로 지나치게 단순화하면 안 된다. “아버지에게 반발해서 의학을 싫어했다”라고 하면 프루스트의 사상이 너무 축소된다. 오히려 아버지가 대표하는 근대적 합리주의의 권위에 대한 긴장이 프루스트 자신의 독특한 인식론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프루스트의 핵심 주제인 ‘무의식적 진실’과도 연결된다. 프루스트가 의학을 비판하면서 발견한 인간의 모습은 오히려 프로이트와 상당히 가까워진다. 인간은 자기 욕망의 원인을 알지 못한다. 자기가 왜 질투하는지도 모른다. 왜 특정 사람에게 끌리는지도 모른다. 왜 어떤 기억 하나가 갑자기 현재를 뒤흔드는지도 모른다. 즉, “나는 나 자신을 안다”라는 근대적 주체의 믿음이 무너진다. 어떤 지식도 인간이라는 살아있는 존재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벽에 부딪친다.
프루스트에게 진정한 지식은 의사가 환자를 밖에서 바라보듯 인간을 객관적으로 분류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감각과 욕망과 기억의 움직임을 오랜 시간 관찰하는 것에 있다. 이것이 결국 프루스트가 말하는 문학적 인식으로 이어진다. 문학은 인간을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사실 자체를 보존하는 지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프루스트의 의학 불신에는 아버지 아드리앵 프루스트의 권위에 대한 심리적·전기적 긴장이 분명히 한 요소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은 곧 ‘아버지’라는 개인을 넘어 근대의 과학적 지식이 인간을 객관적으로 분류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프루스트는 흥미롭게도 의학을 거부하면서 의학자보다 더 집요한 인간 관찰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