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사랑의 대전제는 상호 수평적 의식이다. 그렇다면 공직자가 공직자로서 인간애를 갖게 하기 위하여 공직 슬롯는 수직적 시스템을 완전히 폐기해야만 하는가? 이는 지나치게 극단적인 결론이며 현실적인 수용의 가능성도 매우 낮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사실은 수직적 시스템이 결코 공직 슬롯 안에만 존재하는 특수한 요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인간을 위아래로 구분해 서열을 매기려는 의식은 인간 자체의 본성이다. 아니, 어쩌면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 대부분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슬롯 안에는 이미 셀 수 없는 수직적 평가들이 존재한다. 10대 학생 때는 성적으로 서열이 매겨지고, 비공식적으로는 싸움 실력이나 무력으로 서열이 매겨지기도 한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학벌이나 재력으로 수직적 비교 평가를 받곤 하며, 전 생애에 걸쳐서 외모의 우열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학벌주의나 외모지상주의라는 말이 괜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즉 공직 슬롯 내부를 수평적으로 바꾸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세상은 공직 안에서든 밖에서든 다각도로 폭력적 잣대를 드리우며, 사람을 위아래로 줄 세운다. 그저 공직 슬롯 외부에선 표면화되어 언급되지 않을 뿐 인간은 이미 인류 공동체 안에서 여러 영역의 계급에 속해 있는 셈이다. 학벌 5급, 재력 6급, 외모 7급 등. 그렇기에 공직 슬롯를 변화시키는 게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 안의 공직자가 한 명의 시민이자 인간으로서 내면의 본질적인 변화를 겪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상호 수직적 의식이 이토록 팽배하고 심지어 본성적이기까지 한 세상에서 과연 상호 수평적 의식에 근거한 사랑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까. 인간은 결코 수직적 평가의 욕구를 버리지 못한다. 인간의 역사가 끝나는 날까지도 그런 위업은 달성되지 못할 것이다. 만에 하나 모든 사람이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세상이 온다면, 그 순간부터는 누구의 인간애가 더 크고 숭고한가에 대해서 또 줄을 세우기 시작할 것이다.
이렇게 본성으로서의 서열 매기기 욕구를 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답을 그 반대의 지점에서 찾는 수밖에 없다. 즉 사랑의 대전제로서 상호 수평적 의식을 가능케 하는 것은 그 대척점인 상호 수직적 의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무한한 차원으로 확장하여 끝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랑의 대척점을 무한히 수용하는 지점에서 바로 사랑의 대전제가 참으로서 성립한다.
사람을 수직적으로 비교 평가할 수 있는 기준들은 무한히 많다. 공직 슬롯에서의 업무 역량을 비교 기준으로 삼는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흔히 ‘누가 일을 잘하지?’라고 간단하게 말한다. 그러나 일을 잘한다는 특성은 끝없이 다양한 세부적인 특성으로 나뉜다. 꼼꼼하게 숫자들을 계산해 내는 것과 창의적인 기획을 고안해 내는 것은 매우 다른 성질을 지닌다. 설령 ‘업무용 소프트웨어를 가장 잘 다루는 사람’이라는 기준을 세운다고 해도, 그 기준 역시 아래아한글을 잘 다루는 사람과 워드를 잘 다루는 사람과 파워포인트를 잘 다루는 사람 등으로 더 작고 다양하게 나뉜다.
만약 성격으로 사람을 줄 세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한결 복잡해지는 문제다. 누군가는 배려심이 더 강할 것이고, 누군가는 리더십이 더 강할 것이고, 누군가는 인사성이 더 밝을 것이고, 누군가는 성실성이 더 강할 것이다. 또 누군가는 부모로서 부성애나 모성애가 더 강할 것이지만 누군가는 회사 동료로서 동료애가 더 강할 것이다. 이렇게 ‘더 좋은 성격’을 판가름하는 것은 어렵고 곤란한 일이다.
수직적 비교 평가의 기준을 지능으로 정한다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현대의 뇌과학 분야에서도 논해지고 있듯, 사람 간 지능의 우열을 단정짓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기존의 IQ나 EQ만으로 지능의 전 영역을 포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외국어를 습득하는 능력, 수학 객관식 문제를 푸는 능력, 행정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능력, 논술형 문제를 푸는 능력, 표정과 어투를 통해 상대의 감정 변화를 파악하는 능력, 명시적 근거가 부족한 상황에서 날카로운 직관을 발휘하는 능력 등. 지능이라는 영역은 수도 없이 많은 세부 영역을 포괄하며, 그에 따른 수직적 비교 평가의 기준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아진다. 그러니 ‘더 뛰어난 지능’을 판별하는 것 역시 상당한 고난도의 작업이 되는 것이다.
사람 간 우열을 모두 가려서 결과적으로 ‘더 높거나 나은 사람’을 단정짓는 것은 이렇게나 힘든 일이다. 정확히는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유한한 능력을 아무리 끌어모으더라도 무한한 수의 기준들에 의한 무한한 수의 서열 평가는 끝내 완수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이러한 논의는 인간 존재의 본성에 뿌리박혀 있는 상호 수직적 의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몽상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의 친-서열주의적 사고방식을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그 비교 기준들의 수가 다양함을 넘어 무한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 간의 수직적 평가 확정을 무기한 유예함으로써 수평적 관계성을 ‘영원히 잠정적으로’ 확보하는 사유이다. 쉽게 표현하자면 우열을 매길 수 없으므로 일단은 대등하다고 가정하되, 그 가정이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단정한다는 의미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100개의 기준으로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을 비교했을 때 A가 모두 앞선다면 사실상 A가 더 우월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라고. 그러나 그러한 판단은 언제든 섣부르고 위험하다. 우열을 매길 수 있는 기준들이 그야말로 무수히 많기에, 이전까지 한 명의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수백 번을 이겼든 수천 번을 이겼든 전체 기준들의 관점에선 여전히 터무니없이 적은 수의 표본을 확보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열의 확정적 판단은 영원히 보류될 수밖에 없고, 그 보류의 시기만큼 동등성은 추정된다.
거듭 말하지만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대전제는 바로 상호 수평적 의식이다. 상호 수평적 의식이야말로 어느 일방에 대한 존재론적 지위의 격하를 범하지 않은 채로 인격체의 온전한 긍정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와 인간 현존재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은 그 반대인 상호 수직적 의식이다. 이것은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이며,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이는 선택지밖에는 고를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잔인한 선택지를 영원히 무한정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서열주의-평등주의의 임시적(그러나 유효기간의 끝을 볼 수 없는) 역전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사랑의 대전제는 무한한 차원 속 상호 수직적 의식이다. 끝없는 종류의 서열 평가와 그에 따르는 판단 불가능성이 상호 동등성을 영원히 잠정적인 결론으로 도출하게 된다. 그러니 공직 슬롯가 유지하고 있는 위계질서는 진정한 인간애의 확립을 위해서 파기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공직자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의 생리인 서열주의를 더욱 전방위적이고 심층적인 차원들로 확장하여, 그 무한서열주의를 적극적으로 내면화해야 한다. 그저 계급이나 나이 정도에 국한되어 온 얄팍한 위계가 복잡다단한 인간성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풍요로운 위계로 나아갈 때, 바로 그 지점에서 진정한 인간애는 꽃핀다. 그리고 그 사랑에서부터 여러 부차적 미덕들은 필연적인 온기를 품고 구체적 현실로의 태동을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