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자의 윤리: 사랑의 대전제(上)

by오랑

결국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공직자에게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선 이미 수많은 답들이 제시되어 왔다. 청렴, 정직, 공평, 희생, 성실 등. 이 가치들이 공직자에게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들은 모두 이차적 덕목에 해당한다. 인격 주체(공직자)가 상대(자신과 같은 공직자를 포함한 국민 전체)에게 근본적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고 있어야만, 청렴이나 정직 같은 가치들이 실질적으로 발아할 수 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워낙 낭만주의적 뉘앙스를 강하게 지닌 탓에 공직 슬롯 역시도 직접적으로 사랑을 강조하는 일은 드물다. 대신에 무작정 암기를 하라는 듯 부차적 가치들(특히 ‘청렴’을 지겹도록 내세운다.)을 온 장소에 표기하며 단순 세뇌를 하곤 한다.


물론 사랑의 범위는 너무 애매하고도 넓다. 종교적 신앙이 굳건한 사람에겐 신이 사랑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종교 대신 자연과학을 맹신하는 이들에겐 우주나 물리적 세계가 대상이 되기도 한다. 동물(인간 외의)을 끔찍이 사랑하는 이들도 넘쳐나는 세상이며, 식물이나 특정 사물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빈번하게 보인다. 다양해진 개성만큼이나 사랑의 모습들 역시 다양해진 셈이다. 그러나 이 글이 인간 슬롯의 공직 윤리에 대해 논하는 짧은 글이니만큼, 필자는 이 글에서의 사랑을 보편적인 인간애로 한정하고자 한다.


사랑을 강조하는 메시지는 사실 월트 디즈니 컴퍼니나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부터 떠오르게 할 만큼 환상(말 그대로 판타지)적인 어조의 클리셰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당장 행정 시스템을 개선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들이 훨씬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구체성은 추상적 사고의 토대를 근거로 삼아야 진정으로 정립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서로를 사랑하려면 어떤 사유를 거쳐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한다.


기존 공직 윤리들의 대전제가 바로 사랑이라면, 공직자(또는 인간)로 하여금 그 사랑의 마음을 갖는 것을 가능케 하는 대전제는 또 무엇인가. 바로 이 물음에 답하고 그 답을 해명하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이다. 사랑의 대전제를 밝히는 것은 인간을 사랑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지름길을 밝히는 것이요, 결과적으로 그 사랑을 통해 다른 덕목들을 향하여 나아가게 만드는 이정표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인간애의 확립을 위해 인간이 해야만 하는 중요한 사유를 발굴하고자 하는 것이다.






늘 그렇듯 답이란 짧고도 간단하다.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대전제는 바로 상호 수평적 의식이다. 너와 내가 대등한 존재라는 자각과 그것에 대한 수용이 있고 나서야 진정한 사랑은 시작된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명확히 구분되는 체계 안에서의 애정에는 사랑 외의 기타 감정들이 뒤섞이기 쉽다. 여기에서의 기타 감정들이란 자비, 연민, 관대, 동정, 충성, 존경 등이다. 이런 감정들은 상대방에 대한 나의 수직적 우위 또는 열위를 전제로 삼고 있다. 이 전제는 곧 나 또는 상대방에 대한 존재론적 평가 절하를 수반하는 것이기에, 이 감정들이 진정한 사랑이라 불리기엔 무리가 있다. 이 경우에 대한 예외는 주로 가족(부모-자식)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비혈연적 타자들이 모여 수직적 질서를 공고히 유지하고 있는 공직 슬롯는 사랑의 대표적인 안티 테제일 수밖에 없다.


공직 슬롯의 가장 두드러지는 구조적 특징은 바로 계급적인 위계질서이다. 사람과 사람을 계급으로 나누며, 심지어 그 계급은 숫자로 표시된다. 숫자가 작을수록 높은 사람이며, 숫자가 클수록 낮은 사람이다. 사람 사이의 위아래가 명칭에서부터 이토록 간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만큼은 군대보다도 더 강력한 위계적 면모를 공직 슬롯가 지녔다고 볼 수 있다(물론 군대도 넓은 의미에서의 공직 슬롯이긴 하지만).


공공의 거대한 행정 시스템 안에서 대규모 인원이 일사불란하게 업무를 처리하게 만들기 위해 이러한 위계질서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것은 분명한 이점을 지닌다. 그 이점은 당연하게도 효율성이다. 효율성을 제고함으로써 각종 행정 절차의 속도와 정확성을 높이고 결과적으로 국민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는 것이다. 국가 및 지방 행정의 효율성 확보는 엄연히 슬롯 정의의 일부로 간주될 만하고, 그것에 기여하는 엄격한 위계질서 역시 분명히 긍정적인 가치를 내포한다. 그러나 그로 인해 공직 슬롯에 필연적으로 만연할 수밖에 없는 상호 수직적 의식은 공직자가 인간애를 갖기 힘들게 만든다는 뼈아픈 모순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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