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에 본 영화 중 제일 좋았던 <안개 낀 시절>

by민경민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화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주인공이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원하는 결말을 쟁취하는 것이 영화 서사의 가장 기초적인 틀이다. 예컨대 <어벤져스>의 영웅들이 원하는 건 세계 평화다. <기생충>에 등장하는 기택 가족의 목표는 빌어먹는 삶이다. 사랑을 다루는 영화는 연인과의 사랑을, 범죄 영화라면 범죄의 소탕 혹은 범죄의 성공이 목표가 된다. 목표 자체가 없고 아예 파국이나 무망한 삶 자체를 그리는 영화도 있기는 하지만, 그조차도 대부분은 어떤 성취를 전제로 하면서 성취가 좌절되었을 때의 상황이 중계될 뿐이다.


그런데 성취할만한 목표가 아니면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어떨까. 생존을 추구하던 인물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휘말려 본의 아니게 희생하는 클리셰가 아니라, 처음부터 목표를 성취하는 행위가 주인공에게 오히려 악재로 다가오는 일이라면 말이다.


영화 <안개 낀 시절>(2025)은 1950년대 대만의 가난한 소녀가 오빠의 부고를 듣는 것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소녀가 듣는 부고는 그냥 부고가 아니다. 국민당의 계엄령으로 공포 정치가 자행되던 대만의 '백색 공포' 시절, 지식인이었던 주인공의 오빠는 사탕수수밭에 숨어 지내다 결국 발각돼 처형된다.


문제는 폭정과 부패가 뿌리 깊어 시신 수습조차도 돈을 내야 하는 판국에 있다. 부모님을 잃고 친척집에서 눈칫밥을 먹는 시골 마을의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오빠의 시신을 수습하는 게 너무 부담스럽다. 오빠를 잃고 슬퍼하거나 이 사태를 야기한 시대에 분노할 겨를도 없이 '시신 유실'이라는 시간제한이 떨어진다. 곁눈질로 사람을 쏴 죽이는 시대에 가난한 농촌 청년의 시신 따위 정성껏 보관해 주겠는가(더구나 반동으로 낙인찍힌 자의 시신이라면). 며칠 보관하다가 썩어 문드러지기 직전에서야 공동묘지에 돼지 사체를 쏟아붓듯 처리할 것이다. 주인공 아웨 역시 이 사실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다.


아웨의 삼촌은 이기주의자가 아니다. 그저 한계에 봉착한 소시민일 뿐이다


죽음을 수거하러 떠나는 아웨의 모험은 삼중고로 둘러 쌓여 있다. 먼저 극 초반부에 잘 묘사되었듯 시골 마을을 벗어난 적 없는 아웨에게는 대도시에 안치된 오빠의 시신을 찾으러 가는 길 자체가 위험으로 다가온다. 신뢰가 없는 슬롯에서 정보 없이 무방비로 방치되는 건 가난보다도 끔찍하다.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인신매매범을 분별할 수도 없고, 값비싼 시계를 제값에 팔 수도 없다. 순수함은 인간이 잃어버려선 안 될 영역이지만 한편으로 인간을 가장 나약하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두 번째 고초는 그야말로 가난이다. 얼결에 아웨를 돕게 된 인력거꾼 자오공다오 덕에 어떻게 시신의 행방을 찾는 데까지 성공했어도 관리가 요구하는 목돈을 구하는 게 문제다. 돈이라는 건 항상 양면적인 성질을 갖고 있어서 두 가지 측면에서 사람을 압박한다. 능력을 초과한 사태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 아니면 그만한 액수를 가지고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기회비용의 유혹. 영화 전체로 보면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도박 장면이 등장한 것도 이런 돈의 속성을 아웨의 상황에 대입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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