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조건인데도 어떤 자리는 다르게 보였다
트레이딩에서 규칙의 중요성을 알게 된 뒤 나는 가능한 한 많은 것을 규칙으로 만들려고 했다. 진입 조건을 정하고, 손절 위치를 정하고, 한 번의 거래에서 감수할 위험을 제한했다. 수익이 나면 어디에서 일부를 정리할 것인지, 연속 손실이 나오면 언제 매매를 멈출 것인지까지 미리 결정하려 했다. 감정이 개입할 여지를 줄이고 같은 상황에서 같은 행동을 반복할 수 있다면 매매가 훨씬 안정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방향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금도 트레이딩의 기본은 규칙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손절과 포지션 사이징처럼 계좌의 생존과 직접 연결되는 부분을 순간적인 판단에 맡기는 것은 위험하다. 손실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인간은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렵고, 자신의 포지션에 유리한 이유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그래서 최소한 어디에서 틀렸다고 인정할 것인지, 얼마까지 잃을 것인지는 거래 전에 정해두는 편이 낫다.
그런데 규칙을 만들고 백테스트를 반복할수록 오히려 이상한 부분도 보이기 시작했다. 차트만 놓고 보면 거의 같은 조건인데 어떤 거래는 유난히 좋아 보이고, 어떤 거래는 규칙상 진입할 수 있음에도 손이 잘 나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것을 단순한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규칙이 있는데도 망설이는 것은 두려움이고, 반대로 조건이 조금 부족한데 들어가고 싶은 것은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런 경우도 많았다. 손절을 연속으로 당한 뒤 좋은 자리가 나왔는데도 겁이 나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경험에서 나온 판단이라기보다 손실에 대한 두려움일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큰 수익을 낸 직후 평소라면 넘겼을 자리에 들어가는 것은 자신감이 과해진 결과일 수 있다. 이런 감정은 오히려 규칙으로 제한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재량적 판단을 그렇게 설명하기에는 뭔가 남는 부분이 있었다.
오랫동안 차트를 보다 보면 조건 몇 개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차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똑같이 지지에 도달한 차트라도 한쪽은 가격이 급하게 떨어지면서 지지를 강하게 두드리고 있고, 다른 쪽은 하락의 힘이 서서히 약해지면서 천천히 접근하고 있을 수 있다. 둘 다 ‘지지 도달’이라는 조건은 충족하지만 내가 받아들이는 의미는 같지 않다.
상승 추세에서 눌림이 나왔다는 조건 역시 마찬가지다. 한 차트에서는 가격이 이전 상승분을 거의 훼손하지 않은 채 얕게 조정받고 있고, 다른 차트에서는 캔들 몇 개 만에 상승분을 상당 부분 반납하면서 내려오고 있을 수 있다. 지표만 보면 둘 다 상승 추세이고 같은 이동평균선 부근에 도착했을지 모르지만 실제 가격의 움직임이 주는 느낌은 다르다.
‘느낌’이라는 단어를 쓰면 트레이딩이 갑자기 비과학적인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그래서 나 역시 이 표현을 한동안 꺼렸다. 그러나 꼭 신비한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운전을 오래 한 사람이 앞차의 움직임을 보고 정확한 수치를 계산하지 않아도 불안한 상황을 느끼는 것과 비슷할 수 있다. 모든 정보를 의식적으로 하나씩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된 경험을 통해 여러 단서를 동시에 처리하는 것이다.
트레이딩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것 같다. 가격이 어느 정도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지, 고점과 저점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지지와 저항에 접근하는 과정이 어떤지, 반등할 때 캔들의 힘은 어떠한지, 거래량이 어느 순간 붙는지, 상위 시간봉과 하위 시간봉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사람은 동시에 보고 있다. 각각의 요소를 하나씩 말로 설명하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들이 한꺼번에 결합되면서 ‘이번 자리는 평소와 조금 다르다’는 판단이 만들어질 수 있다.
자동매매를 만들면서 이 차이를 특히 많이 느꼈다. 사람이 보면 명확하게 다른 차트인데 프로그램에게는 같은 조건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있었다. 조건을 더 추가하면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필터를 넣기 시작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너무 많은 예외를 규칙으로 만들수록 전략은 복잡해지고, 과거 데이터에 지나치게 맞춰질 가능성도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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