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실현에 대한 사유 (1/5)
서점과 SNS, 각종 강의에 '자아실현' 메시지가 넘쳐난다. 무엇이 자아실현인가. 남들과 비교하지 않는 자기 위로. 미라클 모닝, 운동, 독서 등 자기 관리. 좋아하는 일을 하거나 퍼스널 브랜딩을 하는. 원하는 것을 이루며 사는. 내 취향으로 삶을 채우는 것이 '자아실현'인가.
삶을 '전시' 하는 것, '전시' 된 삶을 쫓는 것이 나를 실현하는 과정일까.
'불안의 시대'.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빠른 변화와 모두의 '과시'를 볼 수 있는 초연결성은 우리에게 '불안'을 제공한다. AI를 기반한 빠른 변화는 내 존재의 필요를, SNS를 통해 쏟아지는 과시들은 나에 대한 존중을 잃게 한다. '불안'은 이제 보편적 감정이다.
우리는 '불안의 시대'를 살아내기 위해 '자아실현'을 쫓는다. 그것을 얻어내면 안정될 것 같다. 흔들리지 않을 것 같다. 많은 곳에서 말하고 있지 않는가. 다들 그렇게 해내고 있지 않는가. 다만, 왜 나는 여전히 공허함 속에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유별난 걸까. 혹시 시중의 '자아실현'이 우리의 '불안'을 타깃으로 하는 상품화된 메시지인 것은 아닐까.
자아실현은 무엇인가. 무엇을 실현해야 하나. 또 뭔가를 노력해서 해내야 하는 건가. (자연상태의) 나무는, 바람은, 구름은 자신을 실현하며 존재한다. 바람의 본질은 부는 것이다. 부는 것으로 자신을 실현하며, 불어옴으로 존재한다.
자아실현은 무엇인가.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다. 자아는 무엇인가.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창세기"에서 신은 세상을 창조할 때, 인간에게 '숨'을 불어넣었다. '숨'을 통해 자신의 본질인 사랑을 인간에게 불어넣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본질을 "사랑의 방향성"으로 설명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무언가를 사랑하도록 지어진 존재이며, 인간이 느끼는 불안과 공허는 근원적 사랑이 아닌 덧없는 외부의 것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반면 근대에 이르러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며 인간의 본질을 이성과 냉철한 사유에서 찾았다.
그러나 그 이후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근원적 바탕을 다시 파고들었다. 막스 셸러는 인간을 단순히 '이성적 동물'로 규정하는 전통을 비판하며, 인간을 본질적으로 "사랑하는 존재"로 재정의했다.
현대 현상학자 장뤼크 마리옹 역시 데카르트를 뒤집어 "나는 사랑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선언한다. 인간은 이성적으로 계산하기 전에 이미 무언가를 사랑하고 열망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인간의 본질은 사랑이다. 다만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사랑'과는 출발점이 다르다. 그는 인간이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당하면서 경험한 근원적 고독과 불안, 즉 '분리'를 극복하기 위해 사랑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의 관점에서 사랑은 '결핍'을 메우기 위한 필연적 응답이다.
그러나 '숨'에 기반된 사랑은 결핍을 메우기 위한 수동적 필요가 아니다. 태초에 인간에게 불어넣어진 '인간의 본질'이다.
'자아실현'은 자아, 즉, (인간의 본질인)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다. '실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실제로 이루는 것이다. 사랑을 '실제로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바람이 부는 것으로 스스로를 실현하듯, 인간은 사랑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본질인) '사랑'을 실현한다.
우리는 사랑을 하는 것으로 '자아'를 실현한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익숙하지만 본질적 내가 실현되는 사랑은 낯설다. 사랑을 하면 나를 실현할 수 있는가. 사랑하는 것으로 이 '불안의 시대'를 흔들리지 않고, 자아를 실현하며,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