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 위 노랑나비

by펜끝

"에계계, 이게 울타리야?"

허술하다 못해, 발만 툭 갖다 대도 쓰러질 것 같은 장난감 블록 몇 개를 세워놓고는 아이는 의기양양했다.


네 살 난 딸아이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병원 놀이를 하던 중이었다. 난 늘 환자였다. 그저 졸면서 의사 선생님의 말도 안 되는 진단에, 더 말도 안 되는 대답만 몇 마디 해주면 그만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주사 한 대면 끝날 줄 알았는데 깨어나 보니, 딸아이가 내 이마에 청진기를 갖다 대며 말했다.

"엄마는 이제 이쪽으로 넘어오면 안 돼요."

자신을 보호하겠다는 건지, 나를 가두겠다는 건지 알 수 없는 경계를 만들어 놓았다. 막 넘어가고 싶어 발바닥이 간질거렸다. 한 뼘도 안 되는 높이인데, 아이의 입은 철옹성처럼 야무지다.


경계는 거실과 주방 사이에 세워져 있다. 다른 데면 몰라도, 주방 쪽으로는 넘어갈 마음이 눈곱만치도 없었지만, 그래도 이유가 궁금했다.

"왜 안 되는데요?"

아이가 머리를 갸웃하더니 아빠 쪽을 쳐다본다. '말해도 돼요?' 하고 묻는 것 같았다. 머리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오늘 무슨 날인가? 내가 또 뭘 까먹었나?'하고 생각하면서 사탕을 물고 있는 의사 선생님의 처방만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가 그러는데, 엄마는 지금 머리가 제일 아프대요. 아니다, 제일 나쁘대요."

이런, 애한테 별말을 다 한다 싶었다. 남편이 주방에서 소리 없는 '아니야!'를 연발하며 손을 내젓고 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나쁘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다시 물었다. 의사 선생님도 모르는 눈치였다. 입안에서 데굴데굴 굴리던 사탕을 '아그작' 깨물며 되물었다.

"머리는 언제부터 나빴어요?"

할 말도 없고, 그 흔한 주사 한 방의 처방도 없었지만, 데굴거리며 웃다가 그만 울타리를 넘어뜨리고 말았다. 아쉬웠다. 내가 울타리 안에 있었던 건지, 바깥에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머물러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아쉬울 것 하나 없다는 듯이 장난감 소쿠리에 블록을 담았다. 아이의 머리 위에 꽂혀있던 머리핀이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팔랑대는 노랑나비처럼 보였다.


저렇게 주워 담을 수 있는 울타리는 생각지 못했다. 보호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두 팔을 벌려 한 아름 안고 서서 든든한 벽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감당하기 어려워질 때면 벌리고 있던 겨드랑이 솔기가 터졌고, 맞잡은 두 손끝이 더는 닿지 않아 안절부절못했다. 왜 그렇게 힘겨웠는지 이제야 알았다. 울타리는 안에 있는 사람도, 밖에 있는 사람도,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걸 말이다.


꿈을 꾸었다. 둥치가 커다란 나무를 끌어안고 있었다. 팔이 고무처럼 늘어나 그 나무를 두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아프지가 않았다. 나무가 만들어준 그늘이 시원했고 바람이 눈물을 말려주고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노랑나비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내 콧잔등에 앉았다. 두 눈이 모아지고 그 간지럼 태우는 듯한 날갯짓에 나는 '까르르'거리며 웃다가 그만 두 팔을 놓치고 말았다. 나무의 수많은 잎이 나비가 되어 일순간에 날아오르는 게 아닌가. 끌어안고 있던 나무둥치는 투명한 비눗방울처럼 흩어지며 떠올랐다.


비눗방울이 흩어진 자리마다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비로소 두 팔이 가벼워졌다. 꿈이 나를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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