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력과 시선
하필 그날이었다.
'뿅뿅뿅'
동네 오락실에서 파란 화면 가득 쏟아져 내리는 똥파리들을 잡느라 손가락 끝이 달아올랐다. '갤러그' 최고점을 찍던 날이었다. 육 학년 통신표가 나왔다. 우수수 떨어지던 똥파리들처럼 성적이 떨어져 있었다. 아빠가 물었다.
"뭔 일 있나?"
"아빠, 나···, 칠판이 잘 안 보여."
그때는 몰랐다. 이 맹랑한 거짓말의 파장을.
다음 날도 학교를 마치고 쏜살같이 오락실로 갔다. 일등을 놓칠 순 없었다. 그때는 점수가 기록되어 공개되던 때였다. 일등을 지켰다는 뿌듯함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가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를 내미셨는데 안경이었다. 아빠는 급한 마음에, 안경원에 가서 '우리 딸이 셋째 줄에 앉아 있는데, 칠판이 안 보여서 공부를 못했다'고 했단다. 기대 가득한 아빠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안경을 썼다. 세상이 뱅글뱅글 돌았다. 아빠가 둘로 보였다. 우리 집 막내인 황구 '쫑이'가 나를 한심한 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날 밤에 나는 '쫑이'의 얼굴에 검은 뿔테 안경을 그려 넣었다. 아까보다 더 한심하게 나를 보는 거 같았지만, 혼자 안경쟁이가 될 순 없었다. 학교에 다니나 안 다니나, 쫑이와 나는 다를 게 없었다.
쫑이의 안경이 흐릿해질 때쯤 두 번째 통신표가 나왔다. 아빠가 또 물으셨다.
"또 뭔 일 있나?"
"아빠, 나···, 안경 쓰니까 더 안 보여."
다음날 아빠 손에 이끌려 안경원에 갔다. 시력검사라는 걸 했다. 아저씨가 들려준 커다란 숟가락으로 왼쪽, 오른쪽 가려가며 열심히 종알거렸다. 아저씨는 내가 심한 '짝눈'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안경알 두께가 차이가 크게 나서 보기 싫을 거라고 했다. 아빠와 아저씨가 머리를 맞대고 내린 결론은 두 눈의 평균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또렷하지도 흐릿하지도 않은 어중간한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 것 같다.
바야흐로 연애할 나이가 되었다. 안경 따위를 쓸 수는 없었다. 아니, 쓸 필요가 없었다. 세상이 온통 진달래꽃밭이었다. 아무것도 쓰지 않았는데 색안경을 쓴 듯했다. 요상하게도 색상이 수시로 변했다. 남자 친구를 볼 때, 우울할 때, 신나게 흔들어댈 때, 교수님께 혼날 때가 달랐다. 말 그대로 보고 싶은 대로, 느끼는 대로 보였다. 감정이 이성을 이기던 청춘이었다.
지금 바카라상 위에는 여러 개의 안경이 있다. 그냥 안경, 돋보기, 다초점이다. 각각의 용도가 있지만, 남편과 이야기할 때는 안경을 쓰지 않는다. 진달래꽃밭이 흑백으로 변한 지 오래다. 남편이 그날의 아빠처럼, 떨어진 성적이 아닌, 매출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다. 다짜고짜 윙크를 날렸다. 나는 짝눈이다. 왼쪽 눈을 감으면 제대로 보이는 게 없다. 흐릿한 실루엣처럼 말도 뜨문뜨문 듣는다. 보통 때는 윙크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남편이 한 마디 했다.
"고마 해라!"
나의 윙크 사용법을 눈치챘나 보다. 가끔은 한쪽 눈을 감아야 비로소 평온해지는 풍경이 있다. 흐릿하게 보아야 예뻐 보이는 마음도 있다. 또렷해야만 잘 보이는 게 아니라는 걸, 나는 언제부터 알게 된 걸까? 오늘의 색은, 버드나무로 정했다. 윙크를 날리자, 이제 막 연둣빛 안개로 얼굴을 말갛게 씻은 세상이 번져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