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스가 문을 닫으면 그 안의 가치는 어디로 가는가
여기 국민게임 크레이지 아케이드가 있습니다. 우리의 카피바라도, 카피바라의 엄마 카피바라도, 카피바라의 할머니 카피바라도 크레이지 아케이드 유저였어요. 물풍선 하나에 울고 웃던 25년이었죠.
그런데 올해 8월, 크레이지 아케이드가 25년 만에 문을 닫았습니다.
"그럼 제가 모은 아이템은요? 엄마가 사 준 럭셔리 마리드는요?
할머니가 아끼던 그 바늘은요? 다 어디로 가요?"
라이브 「카피바라가 토큰을 깨문 이유」, 오늘은 카피바라 3대의 슬픈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다행히 다 날아가지는 않습니다. 넥슨은 서비스 종료 공지와 함께 유료 아이템 판매를 멈추고 환불 신청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환불표를 자세히 보면 기준일이 있습니다. 올해 3월 11일 이후 산 상품은 환불 대상이었지만, 그보다 앞선 구매분에는 조건이 붙었습니다. 2025년 6월 11일부터 올해 3월 11일 사이에 넥슨 캐시로 산 상품은 아직 임시보관함에서 꺼내지 않은 것만 환불됐고, 그보다 전에 산 상품은 대상에서 빠졌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건 돌려받지 못합니다.
엄마 카피바라가 10년 전에 사 준 럭셔리 마리드
할머니 카피바라가 오래전부터 쟁여 둔 바늘
수년 동안 모아온 각종 아이템과 기록
그리고 무엇보다, 25년 동안 쌓은 추억은 환불표 어디에도 없습니다.
회사가 돌려주는 건 내가 낸 돈의 일부입니다. 내가 쌓아온 가치는 돌려주지 않습니다. 더 안타까운 소식도 있습니다. 이번 달 문을 닫은 한 해외 모바일 게임은 미사용 유료 재화 환불을 대만 거주자에게만 해 줬습니다. 어디 사느냐에 따라 돈조차 못 돌려받는 거죠.
카피바라 가족의 아이템은 어디에 적혀 있었을까요? 넥슨의 서버, 즉 회사의 장부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게임 약관은 아이템을 이용자의 소유물이 아니라, 회사가 허락한 동안 쓸 수 있는 권리로 봅니다. 장부의 주인이 장부를 덮으면, 그 위의 기록도 함께 끝납니다. 할머니 카피바라가 애지중지 쟁여둔 바늘은 처음부터 할머니의 것이 아니라, 넥슨의 장부에 적힌 한 줄이었던 셈입니다.
실제 2021-2022년 메타버스 붐에서는 NFT는 거의 핵심 서사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논리는 아주 매력적이었죠. 아이템을 회사 서버가 아니라 블록체인에 NFT로 기록하자. 그러면 회사가 사라져도 기록은 남고, 그 아이템은 진짜 내 것이 된다.
저도 그 붐 한가운데서 메타버스 플랫폼의 경제시스템을 설계하기도 하고 NFT 기반의 서비스로 창업을 준비하기도 했죠. 사용자의 활동이 디지털 자산이 되고, 그 자산이 다시 가치로 바뀌는 흐름을 믿었습니다. 많은 Web3 메타버스 게임들이 이 부분을 내세웠지만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가 설계했던 메타버스 플랫폼은 문을 닫고, 유료 재화는 돈으로 환불됐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세상에서 꾸민 공간, 만난 사람들, 쌓아 온 활동들은 그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저 역시 저의 피땀눈물이 무색하게 이력서에 한 줄만 남기고(이런 것을 내가 만들었었다...) 실체는 없어져버렸죠.
그때 알게 됐습니다. 기록이 어디에 남느냐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걸요. 아이템의 가치는 그 아이템을 쓸 수 있는 세상에서 나옵니다. 할머니 카피바라의 바늘을 NFT로 만들었다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크레이지 아케이드가 없는 세상에서 바늘은 그냥 바늘 그림일 뿐, 그 바늘로 물풍선을 터트릴 세계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NFT는 디지털 자산의 ‘존재와 소유 기록’을 게임사 DB 밖으로 꺼낼 수 있지만,
그 자산의 ‘쓸모(utility)’까지 영원히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이제 게임을 금융으로 바꿔 보겠습니다. 건물 월세를 받는 토큰, 금을 맡긴 토큰, 채권 이자를 받는 토큰. 이 토큰들의 가치도 결국 블록체인 밖의 누군가가 시스템을 지켜야 생깁니다. 건물을 실제로 갖고 관리하는 사람, 금고에 진짜 금을 넣어 둔 사람, 이자를 내주는 회사.
토큰은 이럴 때 의미를 잃습니다.
토큰 뒤에 자산이 없거나, 남의 것일 때
자산을 맡은 사람이 현생의 시스템을 지키지 않을 때
토큰이 사는 세상, 즉 플랫폼이 사라질 때
토큰을 사기 전에 우리도 깨물어봐야합니다.
① 토큰 뒤에 연결된 자산과 권리가 무엇인가?
② 토큰의 기록이 법적으로도 권리인가? 게임 아이템의 “사용할 수 있는 자격”과 법이 인정하는 재산권은 다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올해 1월 전자증권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분산원장을 증권의 계좌부로 사용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습니다. 이 제도는 2027년 초 시행될 예정입니다. 법이 토큰의 기록을 권리의 장부로 인정하기 시작한 겁니다.
③ 발행한 회사가 망하면, 내 몫은 어떻게 되는가? 건물을 신탁회사에 맡기는 구조처럼, 투자자의 몫을 회사 재산과 법적으로 구분해 두었는지 봐야 합니다. 참고로 회사가 망해도 투자자의 권리가 영향을 받지 않도록 만드는 것을 금융에서는 "도산절연(bankruptcy remoteness)"이라고 합니다.
④ 플랫폼이 사라져도 권리가 남는가? 크레이지 아케이드처럼 문을 닫는 날이 왔을 때, 무엇을 돌려받을 수 있는지 미리 알아야 합니다.
여기 대표적인 예가 있습니다. 3화의 디트로이드 회색 집 다들 기억하시죠? 오늘도 한 카피바라가 그 결말을 물어왔는데요, 사실은 새드엔딩입니다. 투자자들이 토큰을 다 산 지 1년이 훨씬 넘었는데도, 그중 일부 주택의 등기상 소유자는 토큰을 판 회사가 아닌 다른 회사로 남아 있었습니다. 현지 언론은 이 회사가 소유하지도 않은 집의 토큰을 팔았다고 보도했고, 디트로이트시는 방치된 주택 문제로 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소송을 냈습니다. 그리고 올해, 회사는 투자자들에게 월세 배분을 중단한다고 알렸습니다.
블록체인 위의 기록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했습니다. 단, 위에서 언급한 ①, ②, ③이 전부 블록체인 밖에서 무너졌을 뿐이죠. 블록체인은 기록을 지켜 줍니다. 하지만 블록체인 바깥의 진짜 세상 속 시스템까지 지켜 주지는 않습니다.
토큰은 소유권을 기록할 수 있지만, 그 소유권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토큰 바깥의 시스템에 달려 있습니다.
소유의 기록과 소유의 권리는 다르다는 것을 배우기 위해, 카피바라 3대 크아 유저는 꽤 비싼 수업료를 냈습니다... 아? 방금 채팅으로 카피바라 3대가 최신 근황 사진을 보내왔군요!
오늘 라이브는 여기까지! 그 무엇으로도 멈출 수 없는 카피바라 3대의 뜨거운 모험을 응원하며, 다음 라이브로 찾아뵙겠습니다!
참고 자료
디지털타임스, 「넥슨 '크레이지 아케이드' 25년 만에 서비스 종료」: https://www.dt.co.kr/article/12067159
세계일보, 「서비스 종료 후 환불 창구도 운영」(2024.2.26) : https://www.segye.com/newsView/20240226514836
PocketGamer.biz, 「Final Fantasy VII Ever Crisis to end service in October」: https://www.pocketgamer.biz/final-fantasy-vii-ever-crisis-to-end-service-in-october/
Michigan Public (2025.7.25) : https://www.michiganpublic.org/economy/2025-07-25/crypto-real-estate-company-realt-collected-millions-from-investors-for-detroit-properties-it-doesnt-own
Mortgage Professional America : https://www.mpamag.com/us/news/general/detroit-sues-accuses-blockchain-company-of-hundreds-of-housing-violations/541661
Michigan Public (2026.3.20) : https://www.michiganpublic.org/social-justice/2026-03-20/the-model-no-longer-works-crypto-landlords-detroit-enterprise-is-crumbling
금융위원회 보도자료 : https://fsc.go.kr/po010106/860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