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아파트 재건축 전
“글쎄다, 동대표도 대표인데 한 20만 원은 주지 않을까? 우리 동네 통장 아줌마 월급도 20만 원이던데.”
집에 돌아온 정한의 머릿속은 정해가 얘기한 20만 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백수 기간이 길어진 정한은 사실 슬슬 돈에 쪼들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착실한 성격이라 회사 다니며 차곡차곡 모아둔 돈과 퇴직금, 명예퇴직 위로금이 있어 어느 정도는 버티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늙어 죽을 때까지 버틸 수 있는 돈은 아니었다. 퇴사한 후 일자리를 알아보지도 않았고, 뭘 할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저 배고프면 먹고, 잠 오면 자고, 심심하면 바카라 읽으며 본능에 충실한 생활을 했다. 그런 정한에게 동대표라는 직함이 계속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우리 아파트도 문제 많지. 입주 초반에는 난리도 아니었어. 입주민 대표 회장이란 놈이 뒷돈 챙기다 걸려서 주민들 다 들고 일어나고, 그 뒤에도 그런 일들이 이어지다가 한 10년 정도 지나면서 점점 조용해지더라. 근데 뭐 지금도 안 그러겠어? 우리는 동대표 같은 사람들이 뭐 하는지도 몰라. 하물며 누군지도 몰라. 지들끼리 쿵짝하면서 또 뭐라도 해 처먹고 있겠지……. 근데 이게 우리 아파트만의 문제는 분명 아닐 거야. 어딜 가도 있잖아. 그런 일들…… 비리, 부정부패……. 세상 모든 인간들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정해가 넋두리하듯 한 얘기가 뼛속부터 ‘공정’으로 가득한 그의 성격에 불씨를 당겼고, 동대표 월급이 기름을 부었다. 정한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관리실에 전화해서 물어볼까? 아냐, 아냐. 전화해서 ‘동대표 하면 월급 얼마 주나요?’이건 좀 아니지. 그러다 진짜 뽑히면 관리실 사람들이랑 자주 봐야 할 텐데 얼마나 쪽팔려? 근데 진짜 20만 원인가? 그럼 나쁘지 않은데, 이 사람들은 모집 공고를 낼 때 월급 같은 것도 좀 적어놓지…….”
정한은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집 거실을 빙빙 돌며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손으로는 핸드폰에 관리실 전화번호를 눌렀다 지웠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 일단 동대표 후보 지원을 하자. 뽑히고 나서 월급이 없거나 터무니없이 적으면 사퇴하면 되지. 그래! 그렇게 하면 돼.”
그렇게 정한은 일단 동대표에 지원서를 내기로 했다.
“뭐가 이렇게 많아…….”
동대표 후보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서류도 많고, 작성해야 할 내용도 많았다. 필요한 서류를 하나씩 준비하고 칸을 채워 나가던 정한은 한 지점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경력 사항.
그의 펜은 경력 사항 위에서 멈춘 채 서성이고 있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정한은 경력 사항 한 칸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건 매우 짧고 단순한 내용이었다. 그렇게 지원서 작성을 끝냈지만, 그는 지원서를 바로 접수하지 않고 끝까지 고민하다가, 동대표 후보 접수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관리사무실에 제출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마치 이순신 장군처럼. 아직은 단일 후보이지만. 혹여 경쟁자가 나타나 떨어지면 3선 회장 지훈이에게 창피할 일일 뿐만 아니라, 정해도 두고두고 놀려댈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으악! 이건 또 뭐야? 여기 내 사진이 왜 있어?”
다음 날 아침, 쓰레기를 버리려고 엘리베이터를 탄 정한은 벽면에 붙어있는 후보 소개를 보고 경악했다. 손에 들고 있던 쓰레기봉투를 놓쳐 내용물이 바닥에 흩어졌다. 간신히 정신을 차려, 다시 응시했다. 분명 후보 소개에 붙어있는 사진은 10년도 더 지난 정한의 증명사진이었다. 지금의 정한을 비웃기라도 하듯 미소 띤 과거의 자신.
“여보세요, 관리실이죠? 저 8동 동대표 후보자인데요. 엘리베이터에 제 지원서랑 사진이 왜 붙어있어요? 이거 꼭 이렇게 붙여야 하나요?”
“네, 후보님. 법적으로 반드시 공고해야 합니다. 법이 그렇게 되어 있어서 꼭 해야 해요.”
“아니, 그래도 그렇지, 요즘같이 개인정보 보호가 중요한 세상에 사진까지 붙이는 건 좀 아니잖아요!”
“으악! 뭐야? 여기도 있네……. 여기도!”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그는 한 번 더 기겁했다. 아파트 현관 게시판에도 자신의 사진과 지원서가 붙어있었다.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부착한 거예요? 설마 아파트 전체에 붙인 건 아니죠?”
“아, 후보자님은 8동 동대표 후보자라 8동에만 부착했어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좀 이해해 주세요. 동대표 선거도 중요한 선거라 국회의원 선거와 비슷한 절차로 진행되거든요. 투표 끝나면 바로 제거하니까 조금만 양해 부탁드립니다.”
8동만 부착했다니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정해나 지훈이가 당분간 8동에 오지 못하게 하면 될 일이었다.
“근데 왜 제 것만 붙였어요? 다른 후보자는요?”
“공정한님 단독 후보이십니다.”
단독 후보. 경쟁자가 없다. 그럼 당선될 확률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었다.
‘그래, 동대표 월급만 생각하자. 어차피 단독이니까 될 확률이 높아. 월급! 그거만 생각하자고!’
“응, 지훈아 왜?”
“삼촌 집에 있어?”
“응, 왜?”
“엄마가 반찬 갖다 주라고 해서 지금 가려고. 지금 가도 돼?”
“응, 알았어.”
정한은 느긋하게 소파에 누운 채로 지훈이와의 전화를 끊고, 보던 영화를 이어갔다. 그러다 갑자기 머릿속에 뭔가 스치며, 이불 킥을 하듯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돼! 후보자 공고문! 지훈이가 보면 안 돼!”
지훈이가 반찬을 가지고 정한이 살고 있는 아파트 동 안으로 들어서면 현관 게시판이며, 엘리베이터 안에 붙어있는 그의 사진과 후보자 공고문을 보게 될 거란 생각에 황급히 집을 나섰다. 지훈이가 동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입구에서 반찬을 받아 올라올 심산이었다.
“어? 삼촌 왜 나와 있어?”
“아? 하하하, 그냥 바람도 좀 쐬고 하하……. 이거냐?”
“응,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으래. 그리고 엄마가 제발 좀 썩히지 말고 먹으래.”
“아……. 알아……. 알았다고, 삼촌이 가지고 올라갈게.”
“나도 삼촌 집에 가야 해.”
“뭐? 왜? 무슨 일 때문에! 오지 마!”
정한은 순간 당황했다.
“엄마랑 아빠 오늘 늦는다고 외삼촌 집에 가 있으래. 그리고 저녁도 같이 먹으라던데. 라면 콜?”
“어? 라면……. 삼촌은 별론데? 굳이…….”
정한은 지훈이 손에 이끌려 반강제적으로 아파트로 들어섰다. 다행히 지훈이는 핸드폰에 푹 빠져 현관 게시판은 보지 않고 있었다.
“지훈아, 우리……. 오랜만에 운동도 할 겸 계단으로 올라갈까? 요새 계단 오르기가 유행이라더라! 너 유행에 민감하잖아. 어때?”
“헐? 삼촌 갑자기 왜 그래? 제 정신이야? 날씨도 더워죽겠는데 20층까지……. 그리고 저번에 내가 산바카라가자니까 걷는 게 제일 싫다더니.”
엘리베이터를 아예 안 타려고 했던 정한의 작전은 단번에 실패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지훈이는 핸드폰을 보면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지훈이는 계속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동대표 후보자? 이야……. 이분 이름 므찌네. 얼마나 공정하면 이름이 ‘공정한’ 이야? 호호! 안 그래요?”
엘리베이터를 뒤늦게 탄 아주머니가 눈치 없이 후보자 이름을 소리 내어 읽었다. 거기에 더해 이름이 특이하다며 정한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거는 순간, 사진과 같은 사람인 공정한을 발견했다.
“어? 어? 이분이 이분이네? 아이고, 죄송합니데이. 성함이 눈에 확 들어와 가. 호호! 앞으로 공정하게 잘 부탁드립니데이.”
그렇게 아주머니는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내렸고, 지훈이는 정한과 공고문을 번갈아 가며 보고 있었다.
‘젠장, 망했다!’
“그만 봐…. 집에 가서 얘기해줄게.”
“삼촌!”
“묻지 마! 나중에 설명할게. 그리고 너 엄마한테는 비밀이야. 알겠지!”
“왜?”
“당선되면 말하려고 했어.”
“왜?”
“남자가 가오가 있지! 떨어지면 쪽팔리잖아!”
“삼촌도 가오가 있어? 내가 볼 때는 없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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