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해민 씨는 그리움이 앞섰을 뿐이다.
인명과 지명, 상호는 모두 가상의 이름입니다. 매 회차 첫 번째 이야기는 제가 여러 온라인 게임에서 겪은 실화이며, 두 번째 이야기는 빌런의 사연을 지어낸 픽션입니다.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됐던 어느 날. 전화며 카지노톡이며 계속 몰려와서 정신이 없었던 어떤 하루였다. 그 무렵은 사람이 부족해서 다른 부서 사람도 카지노톡 응대를 도와주던 시기였다. 하지만 다른 부서인 만큼 디테일에 있어선 부족할 수 있는 법. 여러 개의 응대를 해줬어도 결국 수습할 게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어쩌겠어라는 마음으로 고객들 말에 답변을 달아주고 있었는데, 타 부서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이 고객 카톡 좀 봐주셔야 할 것 같아요..."
무슨 상황인가 싶어 들어가 보니 화를 넘어서, 같은 인간으로서 사람이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당황스럽기까지 한 발언이 쏟아져 있었다.
- 저기요? 저기요? 위에 하신 안내가 대체 무슨 말인가요?
우릴 도와주던 타 부서 사람이 실수로 정확하지 않은 답변을 해둔 상태였다. 그것에 짜증이 나는 것은 이해된다. 다만 그 고객은 상식적이지 않은 반응을 이어갔다. 우선 관등성명을 요구하더라. 주도권을 잡으려는 사람의 전형적인 방식.
- 지금 안내하신 분 성함이 어떻게 되나요?
당황한 타 부서 직원은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 홍길동입니다.
- 홍길동 씨, 200 따리 월급 받는 홍길동 씨. 그 정도 월급 받고 딱 그만큼만 응대하시는 거예요?
놀랍게도 그 직원은 그보다 높은 월급을 받고 있긴 했으나,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문제는 역한 텍스트를 계속 눈으로 봐야 하는 우리의 고충이었다. 이 고객은 어느 정도 연봉을 받는 사람에게 존중을 표시하는 걸까. 애초에 그 사람의 벌이를 유추하고 그 예상에 맞게 사람의 급을 나눈다는 것인가. 지겨웠다. 부랴부랴 나섰다.
- 고객님, 앞서 잘못된 안내로 불편 끼쳐 드린 것은 송구합니다.
종종 죄송합니다라는 표현으로 진정되지 않는 사람들은 송구하다는 표현까지 써야 했고, 마음 같아선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해야 잦아들까 하는 생각에 아예 상대가 난처해할 정도로 납작 엎드려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이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사람의 비꼼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오싹은 맹랑해져 버렸다.
- 고객님, 감정 소모하시게 된 부분은 죄송하나, 너무 공격적인 말씀은 멈춰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체 뭐가 죄송하고 뭐가 감사하단 말인가, 하지만 이렇게라도 할 말은 해야 했다.
- 제가 뭘 공격적으로 말했나요?
- 3시 16분에 써주신 말씀에선 저희 상담사 분의 월급까지 언급하시며 불편함을 언급하셨습니다. 모두 열심히 응대해 드리려는 입장이니 이해 부탁드리며 비난은 삼가부탁드립니다.
뭐랄까, 몇 분 전에 악귀가 들리기라도 했던 걸까. 갑자기 그 고객은 태세가 바뀌었다.
- 너무 답답해서 그랬습니다.. 제품을 고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실 귀사의 제품을 사준 친구가 죽었습니다..
??? 당황스러운 고백이었다. 하지만 우선 태도가 바뀌었을 때 응대를 마무리 짓긴 해야겠기에, 감사와 죄송을 적절히 섞어가며 필요한 접수를 해주었고 상황은 종결되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다정하기란, 이렇게 서로 어려워야만 하는 것일까. 다정하기보다, 모욕하는 게 훨씬 쉬운 길인 걸까.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해민 씨는 이사 준비에 한창이었다. 버릴 물건 추리는 걸 도와주러 온 친구가 말했다.
"해민아. 이 청소기도 버리면 돼? 잘 안되는데?"
"아냐, 그건 고쳐 쓸란다. 범석이가 준 거야."
둘은 잠시 말이 없어졌다.
"범석이가 너 집들이 선물로 준 건가 보지?"
"어 맞아."
"오래 썼네. 이 집 왔을 때 받은 거면."
"그렇긴 하지. 그래도 버리긴 싫으네"
"흠.. 잠시만 쉬었다 마저 하자."
말 나온 김에 해민 씨는 청소기 업체에 문의를 남겨보고 싶었다. 소파에 눌러앉아 청소기 증상에 대해 문의했다. 구매내역 확인이 필요하다고 하여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를 써주었더니 확인이 되지 않는단다.
아차차, 범석이의 이름을 말해야 했지.
- 윤범석. 010-****-****
그랬더니 정보가 안 뜬다는 것 아닌가. 세상에 내 친구가 없다는 걸 이렇게까지 확인해야 하나 하고 욕이 올라왔다. 왜 안 뜨냐는 질문을 하니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엉뚱한 안내만 이어가는데 더는 참기가 어려웠다. 글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격을 하고 싶었다. 욕을 하지 않으면서도 이 건성건성 응대하는 상대에게 모욕감을 줄 수 있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한참을 쏟아내고 청소기만 막막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카톡이 다시 왔다. 비난과 폭언을 하지 말아 달라고. 그제야 자신이 보낸 글을 다시 읽었다. 평소의 자신답지 않은 태도였다. 범석이가 봤더라면 뭐라고 했을까. 어디에 가서도 싫은 소리 안 했던 친구였다. 한심한 모습을 보여 미안했다. 회사에서 만나 좋은 친구가 되어줬던 범석이. 자신이 후임으로 들어와서 한참 헤매는데도 감싸주었던 친구.
자신을 답답하게 했던 카톡 너머의 직원도 결국 신입이었을지도 모르는데 감정에 앞서서 바보같이 굴었다는 생각에 미안해졌다. 자신이 왜 이렇게 못난 말을 쏟아냈는지 궁금하지도 않겠지만 그냥 주절거리고 싶었다. 당신을 공격할 의도는 없었노라고. 그리고 얼마 안 가 AS접수가 되었다.
범석이에게 털어놓고 차라리 잔소리라도 듣고 싶어지는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