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열 번쯤 봤을 거예요.”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6학년쯤. 가수 신승훈이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했던 말이다. 그때는 이해가 안 됐다. 이미 본 걸 왜 또 보는 걸까. 같은 내용인데.
신년 계획을 세울 때마다 터줏대감처럼 차지하는 두 가지 항목이 있다. 독서, 영어 공부. 올해는 새로운 바카라 보다 재독 하는 걸 목표로 잡았다.
영어는 일상회화를 위해 리얼 클래스 3년 회원권을 결제했다. 친구와 아이디를 공유하긴 했지만, 내 돈으로 50만 원 이상은 냈다. 돈을 써야만 행동할 줄 알았다.
20대 온라인 게임인 시절. 대구에서 부산까지 KTX로 출퇴근하면서, 아이팟으로 <이근철의 굿모닝 팝스>를 들었다. 같은 방송을 최소 세 번은 반복해서 들었다.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을 거란 의지로. 싱가포르에서 지낸 6개월보다, 출퇴근하며 쌓은 2년이 내 영어에 더 도움이 됐다. 귀가 뜨이고, 말이 붙었다.
시간이 흐르는 30년 동안, 틈틈이 영어 공부를 하긴 했지만 한 달을 넘기지 못했다. 올해는 돈이 아까워서라도 앱을 켰다. 영화 채널을 골랐다. 예전에 팝스 잉글리시에서 영화 대사로 많이 배웠던 기억이 있어서다.
세 번은 본 영화, <어바웃 타임>을 선택했다. 28일 챌린지였다. '28일까지 할 필요 있나, 보름이면 끝내지'라고 생각했는데, 석 달 가까이 걸려 마무리했다. 그리고 같은 영화로 다시 28일 챌린지에 돌입했다.
1일 차, 2일 차 대사가 낯설었다. 장면은 기억나는데, 그 상황에서 쓰인 단어와 문장이 새로웠다. 그때 집중을 못 한 걸까, 그냥 잊은 걸까, 에빙하우스 망각곡선을 피하지 못한 걸까. 가끔 아는 문장이 나오면, 괜히 반갑다.
독서도 비슷하다. 올해 들어 박경리의 <토지>를 재독하고 있다. 스무 권이 넘는 작품이라 혼자 읽기엔 버거워서, 챌린지 방에 들어갔다. 열 명 정도가 있는데 절반 이상은 두 번, 세 번 읽은 사람들이다.
처음 <토지>를 읽을 때는 따라가기 바빴다. 시대 배경이 낯설고, 인물이 너무 많았다. 사투리가 익숙해서 장면을 짐작하며 넘겼지만, 큰 줄기만 잡고 완독 하는 게 목표였다. 완독 한 지 1년도 안 돼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보이는 게 달라졌다. 용이라는 인물만 해도 그렇다. 처음에는 단단하고 믿음직한 인물인 줄 알았다. 시대가 만든 비운의 남자라고 봤다. 다시 읽으니 우유부단하고 단호하지 못한 면이 더 크게 보인다. 그 성격이 삶을 꼬이게 만든 부분도 있다. 물론 그 안에도 대못 같은 고집이 있긴 하지만.
시대 배경도 조금씩 정리가 된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 같은 시대인데, 삶의 격차가 너무 크다. 어떤 곳에서는 신분제가 폐지됐다고 해도, 시골 어딘가에는 아직도 신분제도가 남아 있다. 어떤 도시에서는 신분을 막론하고 신여성이 등장하는데, 어떤 곳에서는 그게 아예 불가능하다. 내가 알고 있던 그 시대가 맞나 싶을 정도.
그럴 때마다 아빠와 할아버지가 살았던 시간을 떠올린다. 그 시절을 그릴수록, 격차는 더 선명해진다. 그래서인지 환국이, 윤이, 명희 같은 인물보다 홍이, 한복이, 석이 같은 인물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다만 “꼭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라는 마음은 여전히 서희에게 간다.
어릴 때는 같은 걸 여러 번 보는 사람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같은 영화를 다시 보며 놓친 대사를 찾고, 같은 소설을 다시 읽으며 인물을 다시 해석하는 나를 보며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부끄럽다. 아마 세 번째로 보면 또 다른 장면이 남을 거니까.
생각해 보면, 그때도 반복해서 뭔가를 듣고 봤었다. 10대 때 카세트테이프로 노래를 듣던 시절, 좋아하는 곡만 계속 돌려 듣다가 테이프 한 구간이 늘어나서 버린 적이 있다. 또 그러기 싫어서 공테이프 양면에 같은 곡을 수십 번 녹음해 들었다. 좋아하는 가수가 TV에 나오면 비디오에 녹화해 두고 여러 번 봤다. 거실에서 그렇게 보고 있으면 엄마는 “대체 왜 같은 걸 처음 보는 것처럼 좋아하니?”라고 물었다.
나이 드니 더 그렇다. 한 번 봐서는 남지 않는다. 반복해서 볼 때야 내 것이 된다. 놓쳤던 말이 들리고, 대사의 뜻이 파악되고, 같은 인물도 달리 보인다. 그래서 올해가 끝나도 새로움보다 다시 보는 비중을 늘리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