텁텁함이 구수해질 때

by소믈리연
Gemini_Generated_Image_k41oe1k41oe1k41o.png

나이 든다는 게 이런 건가. 군데군데 아픈 데가 생기고, 자도 자도 피곤하고, 뭘 먹어도 소화가 잘 안 되는 것 같은. 몸이 고장 나는 신호 말고도 다른 신호가 있다. 바로 입맛의 변화다. 나는 본디 팥이나 밤처럼 먹고 나면 텁텁함이 남는 맛을 좋아하지 않았다. 팥죽, 팥빵, 밤식빵은 내 돈 주고 사 먹을 일도 없었고, 남이 줘도 여러 이유를 대며 거절했다. 아맛나나 비비빅 같은 아이스크림도 빼고. (좋아하는 사람 은근히 많긴 하더라.)

그런데 요즘 내가 사 먹는 간식엔 팥이나 밤이 들어간 게 많다. 조금 전, 공방으로 출근하는 길에 아이스 라테 한 잔을 샀다. 커피를 픽업하려고 서 있는데 근처에 빵집이 보여서 들어갔다. 근데 손이 가는 빵이 없었다. ‘내가 뭐 사러 온 거지?’ 질문이 떠오르는 순간, 사장님께 죄송하다는 말을 전하고 나왔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아 200미터를 걸었다. 상투 과자를 파는 곳을 향해. 점심 식사 시간이면 사장님이 자리를 비우는 걸 알기에 발걸음을 조금 재촉했다. 상투 과자 9개가 들어 있는 한 통을 샀다. 그리고 지금, 라테와 같이 먹으며 텁텁함을 달콤함으로 씻어내는 중이다.


작년 겨울엔 친구가 찰보리빵 5개를 주면서 말했다. “이거 시원할 때 먹으면 맛있어.” 그날 마침, 배고픈 타이밍이기도 했다. 큰 기대 없이 하나를 먹었는데 구수한데 담백하고, 쫀득한데 부담스럽지 않고, 식감까지 좋았다. ‘어? 이게 이렇게 맛있는 거였어?’ 싶어서 하나 더 먹고, 또 하나 더 먹고, 결국 그 자리에서 5개를 다 먹어버렸다. 그리고 얼마 뒤, 동네에 찰보리빵을 파는 가게가 생겼다. 누가 줘도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만 오던 그 빵을, 나는 요즘 수시로 사 먹는다. 내 돈으로 사 먹을 일 없던 빵을. 코로나 팬데믹 전까지만 해도 열차에서 음식을 팔았다. 가끔 승객들이 도움 줘서 고맙다며 호두과자나 찰보리빵을 주시곤 했는데, 내 입으로 들어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무실에 갖다 주거나, 같이 승무한 동료에게 주거나, 집에 들고 가기만 했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기차역이나 고속도로 휴게소만 들르면 호두과자를 산다. 따뜻한 걸 먹겠다며 금방 구운 열 개, 스무 개가 들어 있는 봉지를 핫팩 삼아 감싸 쥐고 차에 올라탄다. 다른 사람도 좋아하겠거니 생각하면서 선물용으로 사기도 한다. 상대가 좋아할지 아닐지도 모르면서.


입맛은 취향만 바꾸지 않았다. 시선과 견해도 바꿨다. 텁텁한 맛이 구수한 맛이 되고, 질긴 식감이 쫀득한 식감으로 변했다. 비슷비슷한 레시피일 텐데, 그걸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진 거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이들에게도 음식을 강요하지 않는다. 뭐든 잘 먹는 편인 둘째도 양파, 당근, 파가 들어간 음식은 안 먹으려고 한다. 불고기를 볶아 주면 채소는 기가 막히게 빼고 먹는 재주도 있다. “이것도 먹어봐. 저것도 먹어봐. 어디 어디에 좋은 거야.” 말은 하지만, 안 먹으면 안 먹는 대로 그냥 둔다. 지금은 저래도 언젠가는 나처럼 맛있어할 시점이 올 테니까. 어릴 때 나는 엄마를 보며 “저건 왜 맛있다고 하지?” 싶었던 음식들이 있었다. 엄마는 좋아하는 얼굴로 먹었고,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내가 그 음식과 그 간식을 먹는다. 가끔, 그때 그것들을 먹던 엄마 표정이 떠오른다. 이렇게 맛있는 걸 왜 안 먹느냐며, 한 숟갈 떠서 굳이 내 입으로 넣어주려 하던 얼굴.

입맛이 바뀐다는 건, 나도 그 나이대에 맞는 어른이 되어간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예전의 나라면 먹지 않았을 음식을 통해 식감을 분석하고 감탄하고, 그 계절이 주는 의미를 입 밖으로 내뱉으며. 달콤하고 구수하게 나이를 음미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늦게 와서 죄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