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읽기와 쓰기, 독서행태의 변화, 새로운 라틴어
오늘날 한국의 문화 생태계는 기이한 모순을 마주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수십 년째 “단군 이래 최대의 불황”이라는 말이 출판계의 고질적인 수식어로 떠돈다. 1년에 바카라을 단 한 권이라도 읽는 인구가 전체의 절반 미만(2025년 국가데이터처 「슬롯조사」 기준 48.7%)이라는 통계가 뒷받침하는 엄혹한 현실이다.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서울국제도서전의 입장권이 조기 매진되어 인파로 도저히 바카라 구경을 하기 힘들 정도의 '오픈런'이 벌어진다. 바카라을 들고 다니고 필사하는 행위를 멋으로 여기는 이른바 '텍스트힙(Text-hip)' 트렌드가 소셜 미디어를 뜨겁게 달군다. 바카라방과 도서전에는 세련된 감각을 소비하려는 젊은이들로 넘쳐나는데, 정작 문해력 저하와 독서의 실질적 종말을 경고하는 목소리는 대학과 슬롯 곳곳에서 끊이지 않는 이 기이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독일의 저명한 미디어문화학자 크리스토프 엥게만(Christoph Engemann)이 집필한 『읽기의 위기』(원제: 읽기의 미래, 헤이북스, 김인건 옮김, 2026년 5월)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해 미디어 기술사적이고 슬롯학적으로 가장 정교한 답을 제시하는 바카라이다.
저자는 바카라이라는 종이 매체의 단순한 물리적 쇠퇴나 대중의 독서 습관 부족을 한탄하는 고루한 문화 비관론에 머물지 않는다. 대신,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대중의 문해율이 높고 정보가 폭발하는 이 풍요의 시대에, 인간의 '읽는 행위'와 '쓰는 행위'가 어떻게 기술적으로 재편되고 있는지를 추적한다. 그리고 독자가 사라진 빈자리에 무엇이 들어섰는지를 파헤침으로써, 인공지능(AI) 시대에 인간이 끝내 스스로 텍스트를 마주해야 하는 실존적 이유를 설파한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현대인이 바카라을 멀리한다고 해서 읽기와 쓰기 자체를 멈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처럼 인류가 매일 엄청난 양의 글을 공급하고 소비하는 시대는 역사상 없었다.” 현대인은 인스턴트 메신저, 소셜 미디어, 이메일, 쇼핑몰 후기 등을 통해 일상적으로 막대한 텍스트를 생산하고 소비한다. 컴퓨터와 모바일 기기는 본질적으로 텍스트 중심의 매체이기 때문이다.
진짜 위기는 텍스트의 총량이 아니라, 지식의 전달 메커니즘이 문자 언어에서 ‘구술 언어(입말)’로 급격하게 재편되는 현상에서 발생한다. 스마트폰과 헤드폰, 스마트 스피커, 자동차 오디오, 팟캐스트, 유튜브, 쇼츠와 릴스 같은 ‘말하기 도구’들의 비약적인 성장은 음성과 영상 중심의 지식 소비문화를 탄생시켰다. 이로 인해 오랜 시간 동안 인류 지적 담론의 정점이자 특권적 지위를 차지했던 ‘문자 텍스트’는 미디어 기술의 배경으로 조용히 밀려나고, 그 자리를 ‘듣기’와 ‘보기’가 점령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러한 기술적 현상을 '플랫폼 구술성(Platform Orality)'이라 명명하며, “플랫폼 구술성에서 읽기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듣기”라고 선언한다. 이 플랫폼 구술성은 과거의 단순한 구술 문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과거의 말은 내뱉는 순간 허공으로 휘발되는 아날로그적 한계를 지녔지만, 플랫폼 환경에서의 말은 컴퓨터 내부에서 자동음성인식 기술을 거치며 문자 언어(텍스트)로 신속히 치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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