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엽편|드라마] 2607 권권拳拳

'두 발을 골반 너비로 벌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서세요. 오늘은 브륵샤사나 자세를 해보겠습니다. 보통 나무 자세라고 하지요. 코로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마십니다, 천천히. 이제 체중을 왼발에 두고 균형을 잡으세요.'


새벽 첫 수업 등록을 한 후 은조는 일주일 내내 같은 자세에서 더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숨을 천천히 들이쉽니다라는 강사의 말이 시작되면 숨소리 위로 지나가는 거친 소리에 몸이 점점 더 흔들리는 것 같았다.


와작 와작


왼발 바닥이 간질거렸다. 균형을 잃게 만들려는 어떤 무거운 들림 같은 것이 느껴졌다. 위로 오르려는 은조의 오른발에서 왼발을 남기고 혼자 도망치는 것 같은 비겁함이 배였다. 온몸에 힘을 주게 되니 더 뻣뻣하게 휘청였다.


발바닥이 조금씩 들썩거렸다. 무언가 지나가고 있는 것처럼 미세한 꿈틀거림이 확연했다. 요가 매트에 풀썩 주저앉아 발바닥을 살폈다. 짙은 갈색의 요가 매트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강사가 괜찮냐며 은조에게 다가왔다. 새벽 아쉬탕가 요가 클래스에서 같이 배우는 두 사람이 은조가 앉아 있는 곳을 흘깃거리고 있었다. 밝은 초록색 매트 위에 서 있는 그녀들의 편안한 눈빛이 부러웠다. 그들은 브륵샤사나 자세를 곧 이어갔다.


'잠시 숨을 고르며 편안하게 다시 서겠습니다, 두 발을 벌리고 편안하게요. 마음의 준비가 되면 그때 다시 오른발을 천천히 올려 보겠습니다.'


이미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은조를 강사가 걱정스럽게 바라보다가 편안해질 때까지 조금 더 쉬어도 괜찮다는 말을 남기고 두 회원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사뿐 거리며 걸어갔다. 새벽반 회원은 단 세명이었다.


와작 와작


귀속을 돌며 자꾸만 커지는 소리에 두 발바닥에 더 힘을 주며 요가 매트에 섰다.


후~


은조가 내쉬는 숨에서 검은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6월 중순, 장마가 시작할 무렵인데도 이곳에 이사를 온 건, 순전히 강 안에 들어서 있는 섬 가장자리를 따라 난 조깅 트레일 때문이었다. 강이 크게 굽이치며 생겼다는 물돌목 마을이라는 지리적 호칭을 가진 꽤 커다란 섬이었다. 어둠이 걷히기 전 서서히 드러나는 나무나 꽃이 신비롭게 느껴지고 강물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짙은 곳이었다. 은조는 물안개가 흐르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보다 소리를 더 큰 파장으로 들어요. 조용한 곳에서 사는 게 마음에 안정을 줄 겁니다.'


심한 두통을 견디다 못해 은조가 찾았던 의사의 말대로 자연에 가까이 이사를 한 셈이었다. 하지만 소리에 대한 극도의 예민함은 무용수인 은조가 음악과 자신의 몸짓이 하나로 합쳐지는 쾌감에 몰입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강물 옆으로 난 5킬로 정도의 트레일을 따라 뛰었다. 조깅하는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전인 새벽 5시, 7월의 그 초콜릿 향기 같은 짙음에 흠뻑 몸을 내맡기면 아침에 일어나 자연을 옷으로 입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섬과 육지를 잇는 다리가 서너 방향으로 듬성듬성 있었다. 그 다리 아래를 뛰면서 모양이 제각각인 다리에도 마음을 빼앗기곤 했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를 본뜬듯한 다리가 집에서 가장 가까웠다. 거기서 달리기를 시작해서 기다란 철제 줄을 높이 매듭지은 듯한 이국적인 다리를 제일 처음 지났다.


섬 중앙쯤에 있는 아파트 5층에서 계단을 걸어 내려와 강가로 나오며 기대하는 바람은 매일 생명을 건네주고 있었다. 그 바람 속을 뛰며 맞는 먼 산으로부터, 강 위를 휘도는 새벽 물안개로부터 하루를 사는 힘을 길어오고 있었다.


아직 어둑해서 윤곽이 보이지 않는 조깅로를 달리다 보면 가끔씩 명랑한 소리가 나곤 했다. 그마저 기쁜 하루를 더해주고 있었다. 모래 찌꺼기가 문질러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운동화와 닿은 표면이 서로 인사를 하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와작 와작


고개를 십 오도쯤 올리고 세포 하나하나를 깨우며 달리는 새벽을 얼마나 좋아했던가. 6-7월 장마라 해도 기후변화 때문인지 매일 습하게 비가 오지는 않았다. 한바탕 쏟아붓고 해가 떴다가 다시 비가 오려는 듯 습해지기도 했다. 밤새 비가 내렸다가도 은조가 달리러 나가는 새벽은 알맞은 습도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러다가 7월 중순쯤부터 뛰는 사이사이 규칙적으로 종종 들리는 그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와작 와작


바삭한 소리를 지나갔다. 다음 다리쯤에서 조금 더 밝아지면 그 소리가 나는 곳을 자세히 보리라 생각했다. 자연이 혼자 내는 소리인지 은조와 자연이 만나 이루는 반가운 소통의 소리인지 궁금해져서 흥분이 점점 높아졌다. 그 몇 분간의 두근거림으로 다음 다리에 가까워지며 신이 나고 있었다. 밤새 내린 비로 길에는 물기가 반짝이고 있었다.


와작와작 소리가 나기 시작하자마자 뛰며 헐떡이던 숨을 참으며 그 자리에 섰다. 어둠이 여전히 채 걷히지 않은 시멘트의 조깅 트레일 위로 무언가 거뭇한 것들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눈을 크게 뜨고 길에 가까이 허리를 숙였다.


으아아악!


놀라 휘청이다 뒤로 한 발을 디뎠을 때 다시 익숙한 소리가 났다.


와작!


수많은 다리를 물결치며 떼를 이루어 길을 점령하고 있는 벌레였다. 윤기 나는 까만 껍질에 싸인 검정에 가까운 진갈색의 작은 생명체들이 꾸물거리고 있었다. 부지런히 마디의 각도를 틀어가며 움직이다가 은조의 운동화에 깔려 부서지며 나는 소리였다. 여러 생명이 일시에 빠져나가며 나는 폭발음이었다. 와작. 와작. 은조가 바꾸는 왼발 오른발 아래서 키틴질의 갑옷을 입은 수많은 노래기가 내는 장송곡이었다.


채 채우지 못한 한 달, 7월의 습한 조깅은 머릿속에 청명한 이명을 남겼다. 꿈을 꿀 때마다 착착 착착 우직 뿌직 와작 탁탁 탁탁 여전히 규칙적인 뜀으로 다리 아래를 지나가고 있었다. 한 발을 디디는 발바닥 아치 안으로 둥근 두께를 뭉툭하게 느꼈다. 셀 수 없는 다리가 몸에 삐죽삐죽 돋아나며 앞으로 앞으로 휘적이는 다리의 행렬을 보았다. 벽마다 노래기가 달라붙어 기어 다니고 있었다. 은조 안에 검은 키틴질의 벌레가 자라나고 있었다. 그들의 빠져나간 생명이 은조 안에 고여 돌아가고 싶다 소리치고 있는 것 같았다.


와작 와작 와글와글



'은조, 무슨 일이야.'


연락이 되지 않아 왔다는 진하가 며칠간 아무것도 못 먹고 누워있던 은조를 흔들었다. 다음 공연 주제가 정해졌다며 '숨'이라고 했다. 은조는 조용히 일어나 벽에 기대앉았다. 숨이라는 단어를 소리 내며 눈물이 났다. 숨이라니, 숨. 은조와 같은 현대무용단의 멤버인 진하가 그간의 얘기를 들으며 운명이라고 말했다.


'난 다른 생명체로부터 숨을 빼앗아 연명하고 있었던 거야.'


은조의 자바카라에 의도적으로 생명을 해친 것이 아니니 다른 순환의 방식으로 생각하면 어떨지 진하가 조심스레 말했다.


'생명의 순환은 어떨까. 그런 숨의 연결로 생각해 보는 거야.'




다음 공연인 '숨'을 위해 지금까지 자신이 무심하게 지나쳤던 모든 생명에 대해 생각한다. 은조는 단단한 마음을 위해 공연이나 연습 틈틈이 해온 요가를 다시 시작한 지 일주일이다. 은조 발 밑에서 스러져간 생명을 의미 있게 이어가기 위해 일어서야 한다고 되뇐다. 이미 산화한 생명들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변명이겠지만.


'자, 다시 시작해 볼까요.'


요가 강사가 다가오며 은조를 바라본다. 코로 천천히 숨을 들이쉰다. 호흡을 이어가며 발을 벌리고 선다. 왼발로 균형을 잡으며 체중을 싣고 가만히 오른발을 들어 왼쪽 허벅지 안쪽에 댄다. 발바닥에 느껴지는 간지러움에 대답하듯 잠시 몸이 흔들린다.


'그래.'


두 손을 맞대어 가슴 앞에서 합장하며 힘을 모은다. 천천히 양팔을 머리 위로 올린다. 잠시 자세를 유지한다. 소리는 여전하다. 힘을 모은다. 자세를 풀어준 후 오른쪽 발로 체중을 옮겨 균형을 잡는다. 코로 숨을 느리게 내쉬며 오른쪽 허벅지 안쪽으로 왼쪽 발바닥을 붙여 단단하게 힘을 모으며 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