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씨앗, 문명을 묻다 23
씨앗을 보존하는 일에는 씨앗의 이름뿐 아니라 그것을 길러 온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는 일도 필요하다. 씨앗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려면 누구에게서 받았는지 알아야 하고, 재배하면서 관찰한 특성을 확인하려면 그 씨앗을 오래 다루어 온 사람의 경험을 들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름은 씨앗을 구별하는 표지이면서 씨앗의 내력을 찾아가는 출발점이 된다.
충남 홍성의 씨앗도서관을 다룬 기록에는 심재순 농부의 찰수수와 이금남 농부가 보관해 온 적두가 소개되어 있다. 이 사례에서 사람의 이름은 작물의 품종명이라기보다 그 씨앗을 길러 온 사람을 가리킨다. 씨앗의 이름만 적어 두는 것과 씨앗을 보존해 온 사람까지 기록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무엇을 보관하는지 알려 주지만, 후자는 그 씨앗을 누구에게서 배우고 어떤 경험을 통해 이어 갈 수 있는지 살펴볼 길을 열어 준다.
사람의 이름이 씨앗과 함께 기록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씨앗을 처음 만들어 냈다는 뜻은 아니다. 씨앗을 처음 길러 낸 사람과 오랫동안 보존한 사람, 다른 사람에게서 받아 이어 온 사람은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름을 기록할 때는 그 이름이 어떤 역할을 가리키는지 확인해야 한다. 사람의 이름을 씨앗의 역사와 동일시하지 않을 때, 이름은 막연한 명칭이 아니라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을 찾아가는 단서가 된다.
농민이 씨앗을 보존하는 일은 수확한 작물 가운데 다음 농사에 쓸 몫을 남기는 데서 시작한다. 어떤 개체에서 씨앗을 받을지 살피고, 거둔 씨앗을 말려 보관하며, 다음 해에 심어 자라는 모습을 확인한다. 재배 결과가 해마다 같지는 않으므로 농민은 여러 해의 경험을 바탕으로 씨앗을 고르고 보존한다. 이 과정에는 작물의 생육과 기후, 병충해, 수확 시기를 살펴 온 지식이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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