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이야기 속에서 다시 만나는 인간의 삶 61
하멜른이라는 마을에 쥐가 들끓었다. 집과 창고에 쥐가 나타났고, 사람들은 쥐를 없애려고 애썼지만 해결하지 못했다. 그때 낯선 사내가 마을에 찾아와 피리로 쥐를 몰아낼 수 있다고 말했다. 일을 해내면 약속한 대가를 달라는 조건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내가 피리를 불자 쥐들이 소리를 따라 움직였고, 그는 쥐들을 베저강으로 이끌었다. 마을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을 괴롭히던 쥐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일이 끝나자 마을 사람들은 약속한 대가를 주지 않았다. 사내는 마을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쥐가 아니라 아이들이 피리 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아이들은 사내를 따라 마을 밖으로 나갔고, 널리 알려진 이야기에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쥐를 없애는 일로 시작한 이야기는 아이들이 사라지는 장면에서 끝난다. 마을 사람들은 바라던 결과를 얻었지만, 그 결과를 얻은 뒤 지키지 않은 약속이 더 큰 상실로 이어졌다.
이 전설은 여러 형태로 전해진다. 아이들이 사라진 장소와 그 뒤의 상황은 판본마다 다르며, 이야기의 바탕이 된 역사적 사건에 관해서도 여러 해석이 있다. 전승만으로 실제 사건의 전모를 확정할 수는 없다. 다만 이야기 속에서 마을 사람들은 약속을 어기고, 사내는 보복하며, 아이들은 그 과정에서 사라진다. 이 세 가지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중심은 달라진다.
마을 사람들이 약속을 어긴 것은 잘못이다. 그들은 사내의 능력이 필요했을 때 대가를 약속했고, 사내는 합의한 일을 해냈다. 일이 끝난 뒤에야 대가를 지급하지 않으려 한 것은 자신들이 얻은 이익은 취하면서 상대의 몫은 인정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사정이 달라졌다면 다시 협의할 수 있었겠지만, 상대의 동의 없이 약속을 없었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렇다고 사내의 보복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사내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지만, 아이들은 그와 계약하지 않았고 대가를 주지 않기로 결정하지도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잘못을 아이들에게 되돌려 줄 이유는 없었다. 약속을 어긴 사람에게 바카라임을 묻는 일과 그 바카라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일은 다르다. 사내의 억울함을 인정하면서도 아이들을 데려간 행동을 비판할 수 있다. 두 사람의 잘못을 구분하는 것은 어느 한쪽을 두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행동이 누구에게 어떤 결과를 남겼는지 정확히 보기 위해서다.
하지만 잘못을 구분하고 나면 또 다른 문제가 남는다. 이 이야기에서 마을 사람들은 쥐를 없애려는 사람들로 등장하고, 사내는 자신의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두 집단의 행동은 자세히 전해진다. 반면 아이들은 처음에는 이야기의 중심에 있지 않다가, 어른들의 약속이 깨진 뒤 갑자기 나타난다. 그들은 피리 소리를 따라 마을을 떠나고, 그 장면에서 이야기는 끝난다. 아이들이 왜 따라갔는지, 떠나면서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결말을 바꾸는 중요한 존재이지만 자기 삶을 말하는 인물로는 남지 않는다. 그들의 실종은 마을 사람들의 잘못을 드러내고 사내의 보복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된다. 그러나 아이들 자신에게는 그 사건이 어떤 경험이었는지 말할 기회가 없다. 이야기는 어른들의 행동을 통해 아이들이 사라진 이유를 설명하지만, 아이들의 삶을 통해 그 실종을 이해하도록 이끌지는 않는다.
오래된 전설이 모든 인물의 마음을 자세히 기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는 사건을 압축하고 갈등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야기가 압축한 것이 무엇인지는 살펴볼 수 있다. 하멜른의 전설은 약속을 어긴 사람과 보복한 사람의 행동을 중심으로 사건을 구성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두 행동이 낳은 결과로 남는다. 아이들의 실종은 사건의 결말이지만, 아이들의 삶은 그 결말 안에서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
아이들이 사라진 일을 마을 사람들이 받은 벌이라고만 읽으면 이 차이는 더욱 흐려진다. 벌이라는 말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그 결과를 감당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사라진 아이들은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이 아이들의 상실을 대신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사내의 보복을 비판할 때도 아이들이 보복의 잔혹함을 드러내는 장면으로만 남을 수 있다. 어느 쪽에서 읽더라도 아이들은 어른들의 행동을 평가하는 근거가 되기 쉽다.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들을 어른들의 잘못과 보복을 설명하기 위한 인물로만 읽지 않아야 한다.
이야기가 끝난 뒤의 하멜른을 떠올리면 아이들이 살던 집과 다니던 길이 생각난다. 아이들을 기다리는 가족이 있었을 것이고, 함께 놀던 친구와 형제자매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전승에 기록된 후일담이 아니라 아이들의 실종이 남겼을 삶을 헤아려 보는 일이다. 가족들이 어떻게 지냈는지, 마을 사람들이 아이들을 찾으려 했는지, 그 뒤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일을 상상으로 채워 새로운 결말을 만드는 것보다, 전승이 거기까지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편이 정확하다.
그렇지만 알 수 없다는 말이 그 삶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아이들이 사라진 순간 이야기가 끝났다고 해서 그들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삶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이야기의 끝은 전승이 선택한 끝이지, 사건에 연루된 모든 사람의 시간이 끝나는 지점은 아니다. 우리가 그 뒤의 일을 모른다는 사실과 그 뒤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판단은 전혀 다르다.
현실에서도 사건의 바카라임을 밝히는 일과 그 결과를 살아가는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서로 다르다. 어떤 조직의 잘못된 결정으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바카라임자가 처벌받더라도, 그 사람이 잃은 수입과 일상은 저절로 회복되지 않는다. 바카라임을 묻는 일은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필요하지만, 피해를 입은 사람의 삶을 다시 살피는 일까지 대신하지는 못한다. 사건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과 그 사건을 겪은 사람이 무엇을 잃었는지 이해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누군가를 돕는 과정에서도 이 차이를 놓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겪은 일을 설명하면서 그 사람의 마음과 필요까지 대신 정해 버리면, 도움을 받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말할 기회를 잃는다. 하멜른의 아이들이 실제로 무엇을 생각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으므로 그들의 감정을 지어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가 전승에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그 빈자리를 임의의 상상으로 채우는 대신, 왜 우리는 어른들의 행동은 자세히 알고 아이들의 경험은 알지 못하는지 물을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쥐가 사라졌을 때 자신들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쥐를 없앤 일과 사내에게 한 약속은 별개의 문제였다. 사내가 보복했다고 해서 약속이 회복된 것도 아니었다. 처음의 잘못을 바로잡는 일과 새롭게 발생한 피해를 감당하는 일은 서로 다른 과제로 남았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선언하는 순간에도,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잃은 것을 살피지 않았다면 해결이라는 말은 너무 일찍 끝난 셈이다.
하멜른의 전승은 아이들이 사라진 뒤 마을이 어떻게 살아갔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가족들이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았는지도 알 수 없다. 이 빈자리를 해피엔딩이나 비극적인 후일담으로 채울 필요는 없다. 이야기의 한계를 넘어 사실을 만들어내지 않으면서도, 기록되지 않은 삶이 있었다는 점은 기억할 수 있다. 아이들은 마을 사람들의 약속 위반 때문에 사라진 것도, 사내의 보복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들의 실종은 이야기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연결되어 있지만, 그들의 삶 전체가 그 행동들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피리 소리는 멈췄고, 전설도 끝났다. 아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그 뒤에 어떤 삶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들을 기다린 가족이 어떤 말을 나누었는지도 들을 수 없다. 이야기에는 마을 사람들의 약속과 사내의 보복이 남아 있지만, 아이들이 자기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없다. 우리는 그 침묵을 함부로 채울 수는 없어도,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지나칠 필요는 없다. 이야기가 끝났다는 것은 그 안에서 사라진 사람의 삶까지 끝났다는 뜻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