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이야기 속에서 다시 만나는 인간의 삶 58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연오랑과 세오녀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 날 연오랑이 바닷가에서 해조류를 따다가 바위에 올라섰는데, 그 바위가 그를 싣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그곳 사람들은 연오랑을 비범한 인물로 여겨 왕으로 삼았다. 남편을 찾으러 나선 세오녀도 같은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고, 두 사람은 그곳에서 다시 만났다. 그런데 두 사람이 신라를 떠난 뒤에는 신라의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나라에 닥친 변화를 이상하게 여긴 왕이 사신을 보내 까닭을 찾게 했고, 사신은 두 사람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왕은 연오랑과 세오녀에게 돌아오라고 청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미 다른 땅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연오랑은 자신이 돌아갈 수는 없지만 세오녀가 짠 비단을 보내겠다고 했다. 왕은 그 비단을 받아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해와 달의 빛이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왕은 비단을 나라의 보물로 삼아 창고에 보관했다. 두 사람이 돌아와 신라에서 다시 살아가는 결말은 아니었다. 그들은 일본에 남았고, 신라는 그들이 보낸 비단으로 빛을 되찾았다.
이 이야기를 오늘날의 자연과학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한 부부가 나라를 떠났기 때문에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비단을 바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빛이 돌아왔다는 것은 실제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러나 신화는 자연 현상을 과학적으로 기록한 문서와 다른 목적을 지닌다. 해와 달이 사라진다는 사건을 통해 옛사람들은 자연의 질서와 나라의 안녕을 연결했고, 그 질서가 흔들렸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야기했다. 이 신화에서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떠난 뒤 신라가 빛을 잃었다는 설정과, 그 빛이 돌아오는 과정에서 두 사람이 직접 돌아오는 대신 비단을 보냈다는 결말이다.
왕에게 두 사람의 귀환은 나라의 빛을 되찾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연오랑과 세오녀는 돌아오라는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그들이 왜 신라를 떠났는지, 일본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왕의 요청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였는지는 이야기에서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바위에 실려 간 사건을 오늘날의 이주처럼 자발적인 선택으로 단정하기도 어렵다. 다만 이야기의 결말에서 두 사람은 신라로 돌아오지 않고, 그들이 보낸 비단이 신라의 의례에 쓰인다. 왕국의 필요와 두 사람의 삶이 하나로 합쳐지지 않은 채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다.
세오녀가 짠 비단은 단순한 선물이 아니다. 신라의 왕은 그것을 받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나라의 보물로 보관한다. 두 사람이 신라에 돌아왔다면 왕은 그들의 귀환을 통해 나라의 질서를 회복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결말에서 돌아온 것은 두 사람이 아니라 비단이다. 비단은 두 사람이 만들고 보낸 것이지만, 신라에 도착한 뒤에는 왕이 관리하는 나라의 보물이 된다. 만든 사람의 손을 떠난 물건은 다른 사람의 목적에 쓰일 수 있다. 그렇다고 그 물건을 만들었던 사람의 삶까지 그 목적에 귀속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공동체를 떠난 뒤에도 그가 남긴 것은 여러 형태로 남는다. 오랫동안 일한 사람이 온라인 게임을 그만두어도 그가 익힌 기술과 만들어 놓은 결과는 이어질 수 있다. 고향을 떠난 사람이 다른 곳에서 배운 지식을 전하거나, 자신이 만든 것을 고향 사람들과 나눌 수도 있다. 공동체는 그 기여를 기억하고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기여가 남아 있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계속 공동체에 속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서로 다르다. 사람이 남긴 것을 소중히 여기는 일은 그 사람을 붙잡아 두는 것과 같지 않다.
공동체가 유지되려면 사람들의 노동과 지식, 돌봄과 경험이 필요하다. 농촌의 삶도 한 사람의 손으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농사를 짓는 사람과 농산물을 가공하는 사람, 물건을 운반하는 사람과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한 사람이 떠나면 그 사람이 맡았던 일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거나, 새로운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때 공동체는 떠난 사람의 기여를 기억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떠났다는 이유만으로 바카라임을 다하지 않았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공동체를 위한 기여는 중요하지만, 개인의 삶을 공동체의 필요만으로 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에서 신라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두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했는지, 신라의 빛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그 뒤에도 비단을 보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들의 마음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채워 넣을 수는 없다. 신화가 알려주는 것은 두 사람이 돌아오지 않았고, 신라가 그들이 보낸 비단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한 가지 차이를 볼 수 있다. 왕국은 두 사람이 돌아오기를 바랐지만, 나라의 질서가 회복되는 데 반드시 두 사람의 귀환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떠난 뒤 그가 남긴 것을 기억하는 방식은 그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지도 드러낸다. 어떤 공동체는 떠난 사람의 업적을 기리면서도 그 사람이 왜 떠났는지 묻지 않는다. 그가 남긴 기술과 성과는 필요하지만, 그 사람의 선택이나 어려움은 관심 밖에 놓인다. 반대로 그 사람이 공동체를 위해 한 일을 기억하면서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정과 새로운 삶을 함께 존중할 수 있다. 기여를 기억하는 것과 사람을 온전히 한 사람으로 대하는 일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연오랑과 세오녀의 이야기는 신라가 빛을 되찾는 장면으로 끝난다. 나라의 입장에서는 잃었던 질서가 돌아온 결말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신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이 만든 비단은 신라에 남았고, 그들의 삶은 일본에서 이어졌을 것이다. 신라의 회복과 두 사람의 귀환이 같은 사건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이 이야기의 결말에 남아 있다. 나라가 빛을 되찾았다는 이유로 두 사람의 삶까지 신라의 소유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떠난 사람이 남긴 빛을 기억하는 일과, 그 사람의 삶을 우리 것으로 여기는 일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