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이야기 속에서 다시 만나는 인간의 삶 56
길을 가던 사람이 강도를 만났다. 가진 것을 빼앗기고 몸까지 다친 그는 길가에 쓰러졌다. 제사장이 그를 보았지만 지나갔고, 레위인도 그를 보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뒤이어 사마리아 사람이 그곳에 왔다. 그는 다친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뒤,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갔다. 다음 날 길을 떠나면서 여관 주인에게 돈을 건네고 그를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는 약속도 남겼다.
이 장면에서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은 여관에 도착했다고 끝나지 않는다. 다친 사람을 길가에서 옮기는 것만으로는 회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관 주인은 그가 머물 곳을 마련하고 필요한 돌봄을 이어가야 했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이 떠난 뒤에 남을 일을 생각해 비용을 맡겼다. 한 사람의 선의가 다른 사람의 노동으로 이어지고, 그 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비용까지 마련된 것이다. 누군가를 돕는 일은 마음을 먹는 순간 시작될 수 있지만, 실제로 그 사람을 돌보려면 해야 할 일과 감당해야 할 몫이 뒤따른다.
예수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답하면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율법교사는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물었다. 예수는 다친 사람을 본 세 사람의 행동을 대비한 뒤, 누가 그 사람의 이웃이 되었는지를 되물었다.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오랜 적대와 거리감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마리아 사람이 다친 이를 돌보는 인물로 등장한다는 점은 중요하다. 이웃은 처음부터 가까운 사이였거나 같은 집단에 속한 사람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길에서 만난 낯선 사람의 어려움 앞에서 누가 멈추어 행동했는지가 이야기의 중심이다.
그런데 이 비유를 읽다 보면 이야기에서 다루지 않은 질문 하나가 생긴다. 도움을 받은 사람은 자신을 구해준 사마리아 사람에게 무엇을 갚아야 할까. 본문에는 환자가 돈을 빌렸다는 말도, 나중에 은혜를 갚겠다고 약속했다는 말도 없다. 사마리아 사람은 환자의 신분이나 성품, 장래의 보답을 확인한 뒤 도움을 결정하지 않았다. 그가 본 것은 강도를 만나 쓰러진 사람이었다.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인지 심사한 뒤 손을 내민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 도움을 받은 사람은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마음 한편에 부담을 품을 수 있다. 어려운 시기에 돈을 빌려주거나 일자리를 마련해준 사람을 오래 기억하고, 형편이 나아지면 받은 친절을 다른 사람에게 돌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고마움이 반드시 갚아야 할 빚으로 바뀌면 관계가 달라진다. 도움을 준 사람이 과거의 호의를 내세워 상대의 선택에 간섭하거나, 도움을 받은 사람이 거절하기 어려운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처음에는 선의로 시작한 관계가 어느 순간 한쪽의 뜻에 따라야 하는 관계로 변하는 것이다.
물론 약속한 의무까지 없애자는 뜻은 아니다. 돈을 빌렸다면 갚아야 하고, 대가를 받기로 하고 맡은 일을 했다면 약속을 지켜야 한다. 서로 합의한 바카라임과 선의로 받은 도움은 구분해야 한다. 생명을 구해준 사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그 사람의 뜻을 따르거나 삶의 결정을 맡겨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감사는 관계를 이어주는 마음일 수 있지만, 상대방이 내 삶을 결정할 권리를 갖게 하는 계약은 아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에서도 그 차이를 볼 수 있다. 그는 환자를 구하고 필요한 비용을 마련했지만, 그가 회복한 뒤 어디에서 살지, 어떤 일을 할지 정하지 않았다. 자신을 기억하거나 보답하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본문이 그의 속마음을 모두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록된 행동에는 환자의 미래를 자기 뜻대로 정하려는 요구가 없다. 그는 다친 사람이 당장 필요한 도움을 받도록 했고, 그다음의 삶까지 대신 결정하지는 않았다. 도움은 다른 사람의 삶을 소유하는 권리가 아니라, 그 사람이 다시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행동에 가까울 것이다.
여관 주인의 역할을 살피면 또 다른 문제가 드러난다. 돌봄에는 시간과 노동이 든다. 환자가 머물 방을 마련하고 먹을 것을 챙기며 상태를 살피는 일은 한 번의 결심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마리아 사람은 여관 주인에게 돈을 건넸고, 추가 비용이 들면 갚겠다고 약속했다. 여관 주인의 수고를 당연한 희생으로 여기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 병원과 요양시설, 재난 지원과 가족 돌봄에서도 돌봄을 맡은 사람에게 필요한 시간과 자원이 주어져야 한다. 누군가의 선한 마음에만 기대면 돌봄은 오래 이어지기 어렵고, 바카라임은 결국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몰릴 수 있다.
재난 직후에는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이고 도움을 보낸다. 하지만 뉴스에서 사건이 사라진 뒤에도 무너진 집을 고치고 생계를 다시 마련하는 일은 남는다. 치료가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 있고, 일자리를 잃은 사람은 다시 생활을 꾸려야 한다. 처음 도움을 시작한 사람의 선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남는 것이다. 그때 필요한 것은 감동적인 선행을 한 번 더 이야기하는 일이 아니라, 누가 남은 일을 맡을지 정하고 비용과 노동을 나누는 일이다. 선한 마음이 실제 생활을 지탱하려면 개인의 행동을 이어받을 사람과 제도도 필요하다.
도움을 받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삶을 결정할 권리도 있다. 몸이 회복될 때까지 다른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도 무엇을 원하는지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생활비를 지원받는 사람도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는 이유로 상대를 언제나 약한 사람,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면 돌봄은 통제로 바뀔 수 있다.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그 사람의 삶을 대신 결정해도 된다는 주장은 전혀 다르다.
비유는 환자가 여관을 떠난 뒤의 일을 알려주지 않는다. 사마리아 사람에게 평생 은혜를 갚으며 살았는지, 자신을 구해준 사람을 다시 만났는지, 훗날 다른 사람을 도왔는지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 뒷이야기를 상상해 덧붙일 수는 있지만, 본문이 말한 사실과 우리가 바라는 결말은 구분해야 한다. 예수의 질문은 환자가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를 평가하는 데 있지 않았다. 어려움에 놓인 사람 앞에서 누가 이웃이 되었느냐는 것이었다. 환자의 미래를 기록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에게 미래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나중에 다른 사람을 도울 수는 있다. 자신이 겪은 어려움을 기억하며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에게 손을 내밀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보답해야만 처음의 도움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치료받아야 하는 사람도 있고, 받은 도움을 다른 사람에게 돌려줄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도움의 가치를 보답 여부로만 판단하면, 회복하는 사람은 자기 생활을 다시 세우는 동안에도 갚아야 할 몫을 짊어지게 된다.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을 도울 힘이 생기는 것은 아니며, 도움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삶 전체가 채무가 되는 것도 아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환자는 끝까지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다. 그는 어떤 일을 하던 사람인지, 가족이 있는지, 어떤 성격이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예수는 그 사람을 설명하는 대신 그를 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들려주었다. 환자가 누구였는지를 몰라도 도움이 필요한 상황은 분명했고, 그에게 필요한 행동도 분명했다.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구했고, 여관 주인은 돌봄을 이어갈 바카라임을 맡았다. 그 뒤 환자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이야기 밖에 남아 있다. 그가 다시 자기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면, 그 길은 누구에게도 갚아야 할 빚으로 정해진 길이 아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