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와 개 - 먹고살기 위해 무엇을 내어놓는가

오래된 이야기 속에서 다시 만나는 인간의 삶 53

by호시우행

늑대는 굶주린 채 길을 걷다가 개를 만났다. 개는 늑대보다 몸집이 크고 살이 올라 있었다. 늑대가 어떻게 그렇게 잘 먹고 사느냐고 묻자 개는 사람이 주는 먹이를 먹는다고 했다. 늑대는 먹이를 찾아 돌아다녀야 했지만 개는 사람이 먹을 것을 마련해주고 있었다. 늑대는 개의 생활이 부러웠다. 먹이를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개는 사람이 사는 곳으로 가자고 했다. 그곳에서는 자신처럼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두 동물이 함께 길을 가다가 늑대는 개의 목을 보았다. 털이 벗겨진 자리가 있었다. 늑대가 그 까닭을 묻자 개는 사람이 자신을 묶어두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늑대는 걸음을 멈추었다. 조금 전까지 부러웠던 살찐 몸이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개에게는 먹을 것이 있었지만 그 먹이를 얻는 데에는 사람이 정한 생활이 따라왔다. 늑대에게는 먹을 것이 부족했지만 목에 걸린 줄은 없었다. 늑대는 개와 헤어져 숲으로 돌아갔다.


우화는 거기서 끝난다. 늑대가 숲으로 돌아가 그날 무엇을 먹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다음 날에도 굶었는지 먹이를 구했는지도 알 수 없다. 개가 그 뒤에 어떤 생활을 했는지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남은 것은 두 동물의 모습이다. 개의 몸에는 먹이가 남아 있었고 목에는 줄이 닿은 자국이 있었다. 늑대의 몸은 야위어 있었지만 목에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두 동물의 차이는 먹이를 얻는 방법에서 생겼다. 개는 사람이 마련한 먹이를 먹었고 늑대는 스스로 먹이를 찾아야 했다. 한쪽은 먹이를 얻는 대신 정해진 곳에 머물렀고, 다른 한쪽은 먹이를 얻기 위해 계속 움직여야 했다.


살아 있는 몸에는 먹을 것이 필요하다. 배가 고프면 먹이를 찾는 일이 하루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면 다른 일을 생각할 여유도 줄어든다. 개에게 사람이 주는 먹이는 편리한 것이기 전에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먹이를 어디에서 어떻게 얻느냐에 따라 하루의 모습도 달라진다. 개는 사람이 사는 곳에 머물렀고 필요할 때 목줄에 묶였다. 늑대는 먹이를 찾아 숲과 들을 돌아다녀야 했다. 개의 몸만 보면 잘 먹고 사는 모습이 먼저 보이지만 목에 난 자국까지 보면 그 생활에 다른 면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늑대가 돌아선 것은 먹이를 싫어해서가 아니었다. 먹이를 얻기 위해 어떤 생활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선택이 옳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숲으로 돌아간다고 배고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개가 잘못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개에게는 먹이가 필요했고, 개는 자신에게 주어진 생활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우화에는 개가 목줄을 괴로워했다는 말도 없고 늑대가 굶주림을 좋아했다는 말도 없다. 두 동물이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겼는지도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늑대가 개의 목에 난 자국을 본 뒤 돌아갔다는 사실만 남는다. 배부른 개와 굶주린 늑대는 단순히 먹이를 가진 동물과 먹이를 가지지 못한 동물로 나뉘지 않는다. 한쪽은 먹이를 얻는 대신 사람의 생활 안에 들어갔고, 다른 한쪽은 먹이를 스스로 구하는 대신 자기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사람의 생활에서도 먹을 것을 마련하는 일은 하루의 다른 부분과 떨어져 있지 않다. 일을 하면 돈을 벌 수 있지만 그만큼 자신의 시간을 일에 써야 한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맡은 일을 하는 것도 월급을 받기 위해 받아들이는 생활의 일부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계절에 맞춰 씨를 뿌리고 수확할 때를 기다려야 한다. 비가 오지 않으면 물을 마련해야 하고 병해충이 생기면 밭을 살펴야 한다. 자기 땅에서 일한다고 해서 모든 시간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장사를 하는 사람도 손님이 찾아오는 시간에 가게를 열고 물건을 준비해야 한다. 물건을 만드는 사람은 주문한 사람의 요구를 살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일을 대신해주는 사람은 약속한 시간과 방법을 지켜야 한다. 돈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시간과 힘을 다른 사람에게 쓰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일을 하며 시간을 쓰는 것을 목줄과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은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농부가 농산물을 내놓고 생활에 필요한 돈을 얻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자신의 노동이나 기술을 내놓고 그 대가를 받는다. 약속한 일을 하고 돈을 받는 것은 누군가에게 억지로 끌려가는 것과 다르다. 다만 일을 선택하는 자리까지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수입이 조금 줄어도 다른 일을 찾을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당장 필요한 생활비 때문에 지금 하는 일을 놓기 어렵다. 어떤 사람은 하루의 노동시간을 줄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한 시간을 더 일해야 다음 달의 집세를 마련할 수 있다. 같은 금액을 받아도 그 돈이 한 사람에게는 남는 돈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반드시 써야 하는 돈일 수 있다.


그래서 먹고사는 문제를 단순히 부지런함이나 의지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 일을 얼마나 오래 할 수 있는지, 어떤 일을 선택할 수 있는지, 일을 그만두었을 때 얼마 동안 버틸 수 있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가족의 수가 달라지고 병원비가 생기고 집세가 오르면 같은 월급도 전혀 다른 무게를 갖는다. 어떤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긴 시간을 일하고, 어떤 사람은 가족을 돌보기 위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미룬다. 어떤 사람은 안정된 수입을 얻기 위해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고, 어떤 사람은 수입이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시간을 지키려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일을 하고 돈을 받지만, 그 돈을 얻기 위해 각자가 쓰고 있는 시간과 몸의 힘은 같지 않다.


생활을 위해 내어놓는 것도 사람마다 다르다. 몸을 많이 써야 하는 사람은 체력을 내놓고, 오랫동안 배운 기술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숙련을 내놓는다.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은 퇴근 뒤의 시간을 가족에게 돌리지 못할 수도 있고, 가족을 돌보는 사람은 그 시간 때문에 다른 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자신의 일을 지키기 위해 수입을 줄이는 사람도 있고, 안정된 수입을 지키기 위해 하고 싶은 일을 뒤로 미루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 더 좋은 선택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는 까닭은 각자가 놓인 생활의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시간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번 달의 생활비를 마련하는 일이 먼저일 수 있다. 선택의 무게는 선택 그 자체보다 그 선택 뒤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를 볼 때 달라진다.


개에게도 먹이를 얻기 위해 받아들인 생활이 있었다. 사람이 주는 먹이를 먹는 대신 사람이 사는 곳에 머물렀고, 필요할 때는 목줄에 묶였다. 개가 그 생활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불편했을 수도 있고 먹이를 얻는 대가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우화는 개의 마음을 설명하지 않는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몸과 목에 남은 흔적뿐이다. 늑대에게도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이 있었다. 목줄은 없었지만 먹이를 스스로 찾아야 했다. 먹이를 찾지 못하면 굶어야 했고, 먹이를 찾으려면 움직여야 했다. 늑대가 숲으로 돌아간 순간 줄 하나는 사라졌지만 먹이를 구해야 하는 일은 그대로 남았다.


그래서 늑대가 돌아간 장면을 자유를 얻은 순간이라고만 부르기는 어렵다. 늑대는 목에 줄이 없는 대신 먹이를 찾는 일을 다시 맡아야 했다. 개 역시 편안하게 먹기만 하는 동물이 아니었다. 사람이 주는 먹이를 얻는 동안 사람이 정한 곳에 머물러야 했다. 두 동물에게는 서로 다른 하루가 놓여 있었다. 어느 한쪽에는 먹이가 가까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먹이를 찾아 움직여야 하는 거리가 있었다. 한쪽에는 사람이 정한 생활의 범위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굶주림을 견뎌야 하는 시간이 있었다. 우화는 그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의 삶에서도 무엇인가를 얻는 일에는 다른 면이 함께 따라온다. 월급을 받는 대신 정해진 시간에 일하고, 사업을 하는 대신 손님과 거래의 위험을 감당하고, 농사를 짓는 대신 날씨와 계절을 기다린다. 가족을 위해 돈을 벌면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 수 있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일을 줄이면 수입이 줄어들 수 있다. 어느 선택에도 다른 쪽의 몫이 남는다. 그래서 한 사람의 생활을 바라볼 때 그 사람이 무엇을 얻었는지만 보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무엇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힘을 쓰고 있는지도 함께 보아야 한다. 돈이 많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넉넉한 생활을 한다고 할 수 없고, 돈이 적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고 산다고 할 수도 없다.


이런 차이를 생각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선택을 쉽게 판단하게 된다. 왜 더 많이 일하느냐고 묻거나 왜 돈을 적게 버는 일을 택했느냐고 묻기 쉽다. 그러나 그 사람이 지금 놓여 있는 자리에서는 다른 계산이 필요할 수 있다. 자녀의 학비를 마련해야 하는 사람과 혼자 생활하는 사람에게 같은 수입은 같은 의미를 갖지 않는다. 몸이 아픈 가족을 돌보는 사람과 혼자 자신의 시간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에게 하루의 한 시간도 같은 가치가 아니다. 누군가의 선택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이 무엇을 얻었는지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선택으로 무엇을 감당하고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늑대는 그런 계산을 오래 하지 않았다. 개의 목을 보고 돌아갔다. 왜 그 줄을 견디기 싫었는지, 숲에서 굶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는지는 우화에 나오지 않는다. 늑대가 자기 앞에 놓인 두 생활을 모두 경험해본 것도 아니다. 그저 눈앞에 보인 개의 목을 보고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을 뿐이다. 그 선택으로 배고픔을 피할 수 없다는 것도 함께 받아들여야 했다. 숲으로 돌아가면 먹이를 직접 찾아야 하고, 먹이를 찾지 못하면 굶어야 한다. 늑대가 택한 것은 편한 생활이 아니라 자신이 감당할 수 있다고 여긴 생활이었다.


우화가 끝난 뒤 늑대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느 날 먹이를 구했을 수도 있고 며칠 동안 굶었을 수도 있다. 개 역시 목줄을 벗어나지 않은 채 사람이 주는 먹이를 계속 먹었을 것이다. 두 동물의 뒤를 더 써 넣으면 이야기에 없는 결말을 만들어내게 된다. 원래 이야기가 남긴 것은 그보다 단순하다. 먹이를 얻는 방법이 달라지면 하루의 모습도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무엇을 먹을 수 있는지만으로는 그 동물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다 알 수 없다.


사람의 생활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월급의 숫자만 보면 그 사람이 하루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일하는지 알 수 없고, 사업의 수입만 보면 그 사람이 감당하는 불안까지 보이지 않는다. 집에서 가족을 돌보는 사람의 노동은 급여명세서에 나타나지 않지만 그 시간도 한 사람의 삶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먹고살기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묻는 일은 결국 그 일을 위해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쓰고 있는지를 묻는 일과 이어진다. 시간일 수도 있고 몸의 힘일 수도 있으며, 가족과 함께할 시간이나 오래 간직하고 싶었던 일일 수도 있다.


늑대는 개의 목에 난 자국을 보고 돌아섰다. 그 순간 늑대가 본 것은 단순한 줄 하나가 아니었을 것이다. 먹이가 생기는 대신 달라지는 하루가 있었다. 숲으로 돌아간 뒤에는 다시 배가 고팠을 것이다. 먹이를 찾기 위해 움직여야 했고, 찾지 못하면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그 불편한 하루까지 알고도 돌아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늑대에게는 배부른 몸보다 목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은 상태가 더 중요했던 순간이 있었다. 그 선택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 채, 늑대는 다시 숲으로 걸어갔다.

작가의 이전글벌거벗은 임금님 - 들키고 난 뒤에도 사람들은 왜 침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