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떠나기

계획이 있었지만 계획이 없습니다.

by오션펌킨

3년이라는 시간을 견디며 버텨온 시간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었나 보다. 팬데믹이 시작되기 직전에 이미 상실감을 경험하고 있었으나 인정할 수 없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열심히 할 수록 건강이 무너졌고 관계가 깨어졌고 자존감이 바닥으로 치달았다.

삶 자체에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모든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한 때부터였다. 운영하던 가계를 정리하면서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할 여력은 없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진지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지 않은가.

당장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에 대한 정리가 필요했다. 그 정리를 통해 다시 시작할 이유를 찾아내야 했다. 그래서 잠정적 휴지기를 갖기로 했다. 바람에 잘 흔들리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모든 슬롯적 관계에서 조용히 빠져 나왔다.

일부러 비교 대상을 눈 앞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조언을 듣기 보다 내면의 말에 집중하기 위해 혼자임을 자처하고 모든 활동은 혼자 하기로 했다. 사람 좋아하던 내가 그 모든 것들을 차단하고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 보겠다고 결심한 것은 살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지금까지 열심히는 살았지만 자신을 위해 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조용히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삶의 방향을 온전히 나를 위한 것으로 돌리기 위해서는 잠시 한 곳에 멈춰서 방향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정해야 했다.

당시에 나를 도와준 환경적 조건이 팬데믹이었다.

모든 행동의 핑계를 팬데믹으로 미룰 수 있었다. 약해진 마음으로 사람에게 의지하려고 만남을 약속했다가 당일날 나가기 싫으면 코로나를 핑계댔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약속 취소, 아니 당일 약속 취소는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통보하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상대방이 나의 신용을 의심할까 염려하는 마음보다 내키지 않는 약속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안도가 더 컸다. 그 때 알았다. 그 동안 슬롯적 이미지 때문에 하기 싫어도 해야 했던 많은 것들을 참아내느라 많이 힘들었다는 것을.

온전히 나와의 시간을 갖기 위해 최소한의 활동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일하고 남는 시간에는 공부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무슨 공부를 하면 좋을까?

그 동안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서 쉬지 않고 배우고 익히고 달려왔었는데, 막상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르겠는데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니 막막했다. 그러다가 주변을 둘러보며 찾아보니 "공인중개사"라는 자격증이 눈에 들어왔다.

적당히 어려워서 성취감도 얻을 수 있고 막상 자격을 취득하면 생각보다 생계유지와 노후 보장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래서 일단 인터넷 강의를 알아보고 두 과목 정도를 수강 신청을 하고 시간 날 때마다 틀어놓고 들었다. 인강을 배경음악처럼 틀어놓고 무작정 들었다. 가족을 따라 외국에 간 할머니가 매일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영어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에서 처럼 듣다 보면 들리는 단어가 있으려나 싶은 마음으로 그냥 무작정 틀어놓았다.

물론 틀어놓고 딴 짓을 하면 결국 딴 짓에 집중하게 되어 귀에 들리는 단어는 없었다. 하지만 위안을 삼으려 했던 것 같다. 일단 시작은 했으니 끝은 보겠지.

그렇게 시작한 공인중개사 자격시험은 3년이 걸려서 취득할 수 있게 되었고 공부하면서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외부의 모든 자극을 차단하며 살아냈다. 살아냈다는 말이 맞다. 나는 그 시간을 살아내었다.

25년 11월 자격증을 취득한 후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운전면허처럼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로 결심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일을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현장에 덤벼들었다. 하지만 세상은 역시 녹록치 않았다.

반 강제적으로 인간관계를 형성해야 했다. 인맥을 늘리도록 강요하는 것도 없지 않았다. 워낙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들 만나는 것을 즐겨하던 터라 3, 4년의 공백은 있었지만 빠르게 흡수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었다. 이제는 사람을 가려서 만날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개개인을 평가하고 등급을 나누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나만의 방어기재로 만들어 놓은 기준은 나를 지켜주는 것이라 믿고 있다. 알고 지내다 보면 상처받을 것이 뻔해 보이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거리를 유지하기로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공인중개사라는 직업은 정직이라는 단어와 매칭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대놓고 사기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정직한 공인중개사가 되고 싶은 사람이다. 돈 버는 일에 급급한 것이 아니라 성실하게 일하고 좋은 매물을 소개해 주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은 사람이다. 그래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자격증은 취득했지만 관련된 업무를 전혀 알 수 없으니 경험을 할 곳이 필요했다. 법인이고 신뢰도가 있는 조직에 들어가 일을 배우고 싶었다. 다행히 기회가 생겨서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개척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때 여행을 가기로 마음 먹었다.

인생 전환기에는 늘 혼자 여행을 다녀왔었다. 다녀온 후 생활이 급격하게 바뀌는 것은 없었지만 삶에 대한 태도가 변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공인중개사라는 업을 진지하게 시작할 때는 혼자 여행을 꼭 하고 오리라 늘 생각했었다.

제주여행을 결정한 이유는 대자연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다. 혼자 여행을 고집하는 이유는 자발적 고립을 통해 온전히 나와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홀로 가는 제주 여행은 인생 전환 시기에 큰 의미가 있다. 이번 여행도 막연하게 계획은 있었지만 상세한 일정은 정해진 것이 없었다. 그래서 먼저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고 숙소를 결정하면서 여행 일정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여행 경비를 기준으로 잡고 숙소와 비행기는 저렴한 것으로 빠르게 결정했다. 다행히 적당한 시기에 적절한 금액으로 모든 것을 맞출 수 있었다. 게스트하우스는 첫 제주 여행에서 좋은 기억들이 남아 있어서 두려움이 없었다. 여섯 명이 한 방을 써야 하는 상황이 낯설지 않고 오히려 좋았다. 때로는 열악한 숙소 환경이 여행을 독촉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일부러라도 혼자 여행에는 좋은 숙소를 선호하지 않는다. (핑계일수도)

버스터미널 근처 숙소라서 제주 어디든 한 두 시간 이내로 다녀올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예상은 맞았고, 남들보다 일찍 출발하면 늦지 않게 돌아올 수 있어서 안전하게 여행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숙소에 도착하고 오후 두 세 시간이 아까워서 동네 한 바퀴 돌아보기 위해 나갔다.

버스터미널이 공항 근처에 위치해 있어서 공항 주변 볼만한 곳으로 걸어 보았다. 지도 상으로 용두암까지 거리가 3,40분 정도면 다녀올 수 있는 정도여서 가볍게 차려 입고 걸었다.

동네도 곳곳에 눈길이 가는 집이나 나무들이 숨겨져 있었다. 사생활 침해라는 생각에 함부로 사진을 찍을 수 없게된 점이 아쉬워서 눈과 기억 속에 박제하는 기분으로 한참씩 바라보다가 발길을 옮기곤 했다.

예상했던 대로 40여 분을 걷다보니 용현과 연결된 용두암까지 걸어서 산바카라을 할 수 있었다. 마음에 무거운 고민이 있어서 마냥 즐기지만은 못하다가 제주 풍경을 보며 애써 떨쳐 보았다. 제주 오면 꼭 들러가는 용두암과 용현 계곡은 첫인상부터 나를 사로 잡았었다. 용두암은 일몰 명소라고 알려져 있지만 언제 와도 좋다. 그 뒤를 이어 용현 계곡까지 보고 나면 모든 근심이 정화되는 느낌이 들어 좋다. 이번에도 역시나 용현계곡의 물 속을 아련하게 들여다 보고 나니 고민도 사그라 들었다. 제주에 온 것을 실감하며 남은 시간 동안 나 자신과 뜻깊은 시간 갖는데에 애쓰기로 했다.

용두암 해변을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 오는 길에 근처 국밥집에 들렀다. 순대국을 워낙 좋아하니 언제 먹어도 좋다. 터미널 근처라 맛이 없을 수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기대보다는 그리 맛있지 않았다. 육지에서 먹는 평이한 프렌차이즈보다 못했다. 호불호가 있으니 나의 입맛이 정답은 아니다. 다만 다음 여행에서 참고하자는 의미다.

6인실 도미토리에서는 주의해야 할 것들이 있다. 그래서 가능하면 씻고 정리해서 지정 침대로 들어가면 다음 날 아침 외출 시까지 나오지 않는게 다반사다. 저녁 늦게 홀에 모여 하이볼과 각자 사온 음식들을 펼쳐놓고 먹는 이벤트도 있다고는 하는데, 일정이 빡빡한 내게는 무리일 듯하다.

해결되지 않은 고민은 여행하면서 정리하기로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보조배터리 및 전자기기들을 충전시키면서 눈을 감는다. 사람들 들락거리는 소리에 잠깐 깨어서 시간을 확인하기를 두어번 하고 나니 숙면에 들어갔다. 깊게 자고 눈을 뜨니 알람 울리기 15분 전이다.

또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