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 속에서도 시원하게 자고 있어 났다. 간밤에 수고한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집 안 가득한 가족의 날숨을 내보내고 아침의 상쾌함을 들이기 위해서다. 하지만 창을 통해 들어온 건 온몸을 순식간에 휘감고, 코를 찌르는 뜨거운 열기였다. 폭염의 기세가 아침부터 맹렬했다. 간신히 5분여를 버티다가 창문을 닫았다. 에어컨을 다시 켰을 때, 피부에 닿은 시원한 바람이 달콤하기까지 했다.
감탄사까지 내뱉으며 행복을 만끽하다가 문득 표정을 굳혔다.
‘후유, 이런 날씨에 뙤약볕 아래서 일해야 하는 사람들은 정말이지 얼마나 힘들까?’
같은 시간, 같은 하늘 아래에서 나는 행복해하고, 누군가는 힘들어하는 상황.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마음속에 작은 바람을 띄우는 것이었다. 그들의 건강이 무사하길, 시원한 바람이나 소나기가 무더위를 잠시나마 가라앉히길.
그날은 여덟 살 라온이와 갈 곳이 있었다. 10분 남짓 걸어가면 되는 짧은 거리였지만 찌는 태양 아래서라면 더 멀게 느껴질 게 뻔했다. 한낮 더위만이라도 피하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아침을 먹었다. 집을 나서기 전, 무더위와의 한판을 대비해 각오를 단단히 하고 무기도 꼼꼼히 챙겼다. 부채와 양산. 그런데 준비가 무색했다.
“우와! 라온아, 부채가 필요 없네. 바람이 이렇게 부네. 시원하기까지 하다. 너무 좋다.”
“응. 시원하다.”
“우와! 이 시간에는 이 길에 그늘이 지는구나!”
“엄마, 양산도 안 써도 되겠다.”
“그러네. 역시 우리는 복이 많다니까.”
“맞아!”
라온이가 당연하다는 듯 맞장구쳤다. 복이 많다고 말하는 것은 나와 우리 집 두 꼬마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과정을 되짚어 보면, 시작은 내 친정 식구의 사랑이었다. 세 자매 집안의 막내였던 나는 ‘신화 너는 복이 많은 아이니까.’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아빠, 엄마, 두 언니가 수시로 해 준 그 말은 축복이 되어 내 삶에 뿌려졌다. 내가 긍정적인 태도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도, 신기할 정도로 운이 좋은 경험을 많이 하는 것도 그 덕분일 것이다.
친정 식구에게 받은 축복을 내 아이들과 나누고자 ‘역시 우리는 복이 많아’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그 결과, 두 꼬마가 작은 행운에도 자신의 복을 예찬하는 앙증맞은 모습을 자주 본다.
청출어람이라더니 내 귀염둥이들의 긍정성은 나의 수준을 넘은 지 오래다. 녀석들은 아주 사소한 일이어도 의미를 부여하고 그 속에서 행운의 흔적을 찾아냈다. 그 기특한 일을 해내고 미소 짓는 얼굴에는 행복감 이상의 것이 담겼다. 자신을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로 여기는 데에서 오는 만족감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복이 많음에 기뻐하기만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우리에게 주어진 복에 대해 보다 가치 있는 생각을 하는 게 바람직해 보였다.
“라온아, 우리한테 왜 이렇게 복이 많은지 알아?”
“음…… 몰라.”
“좋은 일 많이 하라고 이러는 거야. 이 복을 우리만 누리라고 오는 게 아니지. 나쁜 일 많이 하는 사람에게는 복이 안 와. 그러니까 우리는 좋은 일 많이 하자. 우리 복들로 많은 사람도 함께 행복할 수 있게 하자.”
“응.”
내 삶을 돌아보게 한 대화였다. 과연 나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걸까? 내가 누리는 복으로 어떤 좋은 일을 하고 있을까? 이타심을 펼치고 있기는 한 건가? 왠지 부끄러웠다. 아무래도 지금 나의 위치는 이기심과 이타심의 중간 어디 즈음 같다. 무더운 날 집에서 편안하게 에어컨 바람을 즐기면서도, 나와 달리 고생하는 이들을 생각하며 안타까워 하는 나. 그렇다고 그들을 위해 효과적인 행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도 아닌 나. 현재의 나는 거기까지다.
앞으로 내가 추구하는 삶의 길로 계속 나아간다면 위치가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데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나의 바람을 이룬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