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영 기자님의 "그저 하루치의 낙담"을 읽고
누군가의 내밀한 고백을 읽다 보면 불현듯 거울 앞에 멈춰 선 것 같은 서늘함이 찾아올 때가 있다. 박선영 기자님의 문장들을 넘기며 나는 줄곧 내 지나온 궤적을, 그리고 지금도 버겁게 지나고 있는 삶의 단면들을 겹쳐 보였다. 한 때 기자였고 지금은 글을 쓰시는 박선영 작가님의 "그저 하루치의 낙담"에는 그녀의 삶을 관통하는 슬픔이 기록되어 있다.
어린 시절의 가난을 딛고 치열하게 일궈낸 성취 뒤에 보이지 않는 피로. 낯선 타국에서의 삶과 팬데믹이라는 예기치 못한 고립, 그리고 돌아와 마주해야 했던 적응의 진통들. 그 시간 속에서 길을 잃고 우울을 앓던 아이를 지켜보며 겪었던 무력감과 오랫동안 익숙했던 일터의 궤도를 벗어나 결국 혼자 서기로 결심했을 때의 막막함까지, 저자의 시간은 놀라울 정도로 나와 닮아 있었다. 그녀는 그 안에서 온전히 고통스러워하고 울고 그리고 살아 나갔다.
기자로서, 엄마로서, 그저 선하고 좋은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싶은 바람뿐이지만 과정은 늘 순탄치 않았다. 유리 천장을 이겨내려고 버텨온 선배들의 고단함이 고맙지만 내가 그럴 용기는 없었다. 생존이 지상 과제여서 차별 의식과 피해 의식이 뒤범벅되어 있는 한국에서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는 과정은 늘 냉소를 이기는 용기가 필요했다. 슬롯적 약자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 주려 했지만 결국 그의 고통을 팔았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이곳을 벗어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눈 녹듯 사라질 것 같은 착각에 빠지다가도 아무리 멀리 도망쳐도 결국 문제를 짊어진 나는 변함이 없는 것을. 결국 옮겨간 그 낯선 곳이 다시 여기가 되어 살아내야 할 버거운 일상이 될 뿐이다. 남들처럼 떵떵거리며 살게 해주지 못할 거면 왜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냐며 하소연하는 특권의 기본권화가 높아질수록 아이는 힘들어하고 부모는 괴로워진다.
그러나 그녀는 슬픔을 모았지만 거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고통을 겪어야 사람은 단단해진다고 믿었다. 대신 그 고통이 끝없는 절망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 아픔의 순간은 부디 짧고 가볍게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하다. 저자가 건네는 '그저 하루치의 낙담'이라는 말도 결국 힘든 현실이 나를 절망에 빠트려 헤어나지 못하게 하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그래. 오늘 하루 슬퍼하고 내일은 또 새 삶을 살아가야지."
그래서 바카라을 읽을수록 그녀를 응원해 주고 싶어 졌다. 결핍이 빚어내는 삶의 깊이를 사랑하고 세상을 향한 인류애는 그 결핍의 경험에서 나온다는 그녀의 선택이 좋았다. 그래. 우리는 모두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간다. 그녀의 고투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삶의 무게들의 의미를 찾아주는 것 같아서 고마웠다. 내게 힘이 된 것만큼 그녀도 감당할만한 고통만 허락되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