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도 게임처럼 쓰러져도 다시 시작하고 싶다.

개브리엘 제빈의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을 읽고

by이정원

우리 세대는 PC 게임 세대다. PC방에 밤새는 죽돌이는 아니지만 밤새 턴을 넘기며 천하를 경영하던 〈삼국지〉시뮬레이션 게임이나, 한 땀 한 땀 스토리를 따라 모험을 떠나던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같은 국산 롤플레잉 게임들은 어린 시절 나의 일부다. 친구들과 즐기던 스타크래프트는 여전히 프로 선수들 게임을 즐겨 보는 걸 보면서 어떻게 이런 방대한 세계관과 치밀한 규칙을 사람이 직접 만들어낼 수 있을까가 궁금했다. 그 보이지 않는 창작자들을 향한 막연한 경외심과 호기심에 읽은 개브리엘 제빈의 장편소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Tomorrow, and Tomorrow, and Tomorrow) 모니터 너머에서 가상의 우주를 축조해 가는 개발자들의 치열한 뒷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나의 최애 게임 삼국지 - 요즘은 모바일로 즐긴다


소설의 중심축인 세이디와 샘은 어린 시절 병원 휴게실에서 게임으로 처음 만나 하버드와 MIT 재학 중 ‘이치고’라는 혁신적인 게임을 함께 만들며 성공 가도에 오른다. 둘은 서로를 깊이 아끼지만 일반적인 연인 관계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사랑이란 상대가 내게 필요한 것을 건네줄 때가 아니라, 내가 상대의 결핍을 기꺼이 채워주며 거기서 벅찬 기쁨을 느낄 때 완성되곤 한다. 하지만 이 둘은 퍼즐 조각처럼 각자의 지적·기술적 결핍을 정교하게 맞물려 작동시키는 ‘가장 완벽한 공조자’에 머문다. 이 팽팽한 협업은 낭만적인 사랑보다 훨씬 질기고 처절하게 서로의 내면을 잠식해 들어간다.



작품이 그리는 창작의 협업 과정은 대단히 현실적이고 입체적이다. 번뜩이는 예술적 아이디어를 뿜어내는 세이디, 이를 코딩과 직관으로 구현하며 대중의 호흡을 불어넣는 샘, 그리고 시장의 흐름을 꿰뚫고 각기 다른 두 천재가 온전히 역량을 쏟아붓도록 서포트하는 프로듀서 마크스까지, 이들의 앙상블은 한 편의 오케스트라 같았다. 마음이 맞는 사람과의 협업, 나의 작업의 질을 높여 주지만 지적이 날카롭고 성과가 빼앗기는 것 같은 두려움의 양가적인 감정이 드는 그 복잡한 심정을 소설은 새로운 게임을 기획하고 만들고 좌절하고 또 진화해 가는 과정에서 담담하게 보여 준다.


한국계인 작가의 뿌리에서 기인한 다문화적 정체성 또한 소설 곳곳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한국계 혈통을 지닌 샘과 유대계 여성 세이디, 흑인과 일본계 혼혈인 마크스 등 작중 인물들은 저마다의 경계인적 위치에서 오는 소외와 혼란을 안고 살아간다. 이들이 미국 슬롯에서 부딪히는 보이지 않는 장벽과 문화적 갈등은 거창한 구호 대신 일상의 대화 속에 스며들어 있다. 어디도 소속되어 있지 않아 외로운 상황을 게임이라는 대상에 몰입하는 기회로 만들면서 그들의 각자의 영역들을 살아간다. 프랑스와 중국에서 파견 가서 살았던 기억들이 오버랩되면서 이방인의 땅에 살아간다는 것의 무게와 내가 느끼고 즐기고 추구하는 가치의 뿌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마크스가 좋아하던 셰익스피어의 희곡 대사처럼 현실의 상실은 되돌릴 수 없지만, 게임 속 캐릭터는 수없이 쓰러져도 ‘내일 또 내일’ 다시 새 생명을 얻는다. 그리고 그런 게임을 만들던 주인공들도 여러 좌절과 고난 속에서도 다시 의미를 찾고 의지하고 도전한다. 이 바카라의 제목이 내일 또 내일인 이유는 인생과는 달리 게임에서는 실패하면 다시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세상 모든 것은 누구라도 배움을 통해 알 수 있는 법이다.

둘째, 무엇이 고장 났는지 찬찬히 시간을 들여 파악하기만 한다면, 고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피자집을 운영하며 죽은 딸의 손자인 샘을 키운 동현이라는 할아버지는 고장 난 돈킹콩 오락기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샘처럼 감각적이지도 세이디처럼 기발하지는 않지만 마크스처럼 서로 맞추고 판을 깔고 도와주는 일을 즐겨하는 나로서는 동현의 조언처럼 인생을 바라보고 싶어 졌다. 지금 잠시 힘들고 쓰러져도 시간을 가지고 지켜보고 찾아보고 배우고 고민하면 고치지 못할 것이 없다. 그러면 다시 그 지점으로 RESUME 해서 다음 장으로 나가다 보면 우리도 각자의 게임에 엔딩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