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에어컨은 가전이 아니라 '복지'다.
어제부터 발가락 한쪽이 느낌이 이상했다. 자고 나면 괜찮겠지 했는데 통증은 더 심해졌고, 결국은 절뚝절뚝 걸어야 할 정도가 되었다. 매장직이라는 일의 특성상 계속 서있고 걸어야 해서 계속 일하다간 통증이 더 심해질 것 같아 병가를 내야만 했다. 병원을 가니 염증이 생겼단다. 소염제를 먹고 좀 쉬면 나을 거라 했다. 심각하진 않았지만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내 진짜 걱정은 아픈 발가락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 무더운 날씨를 어떻게 버티느냐 하는 것.
함부르크에 드. 디. 어. 여름이 왔다.
이번 주말 최고 온도는 36도일 거라고 한다.
오늘도 30도는 가볍게 넘겼다.
이렇게 온도가 올라가는데도 에어컨이 있는 곳이 잘 없다.
개인집은 당연하고, 회사도 없는 곳이 많고, 심지어 카페, 식당, 가게들도 에어컨이 없는 곳이 많다.
사실 함부르크뿐만 아니라 독일 전체, 나아가 북유럽과 중유럽 국가들 대부분이 비슷한 상황이라고 한다.
나도 집에 에어컨이 없다.
독일에 와서 일해본 온라인 게임 세 군데 모두 에어컨이 없었다. 제법 큰 회사, 대학의 연구실, 매장 등 회사의 유형이 다양했음에도 그 어디에도 에어컨은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지금 일하는 곳은 에어컨이 있다! 에어컨이 복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다.
2024년 통계 기준으로 독일 전체 가구 중 에어컨이 있는 집은 19%*라고 한다.
98%에 육박하는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정말 낮은 수치라고 할 수 있다.
못 사는 나라도 아닌 독일에서 이렇게 더운데도 사람들은 왜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는 걸까?
독일 사람들이 에어컨을 안 다는 데는 꽤 그럴만한(그리고 독일스러운) 이유들이 있다.
함부르크는 북독일이라 여름에도 최고 기온이 25~30도 이상으로 올라가는 날이 1년 중 며칠 되지 않는다. 7~8월에 잠깐 덥다가도 금방 서늘해지니까, 비싼 돈 들여 에어컨을 설치하느니 "한 이주일 선풍기로 버티고 말지" 하는 생각이 지배적인 듯하다. 그마저도 한 달 내내 더운 게 아니라 일주일 더웠다가 일주일 다시 시원했다가 더위가 오락가락한다. 나도 실제로 선풍기로 버티고 있다. 그마저도 참 소박하다.
작은 탁상용 선풍기 하나와 무인양품에서 산 손풍기 하나.
고온다습한 한국의 여름바람과 달리 유럽은 온난건조한 바람이 분다. 그래서 한국은 그늘에 서있어도 숨 막힐 듯 공기가 후덥지근하고 온몸이 끈적해져 오는 반면 유럽에서는 햇볕 아래에서는 매우 뜨거워도 그늘에만 서있으면 한숨 돌리기가 쉬운 편이다. 그래서 시간만 허락한다면 공원으로 나가 나무 그늘 아래에 누워있으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3. 집을 요새처럼 짓는다 (건축 구조)
독일 집들은 겨울 추위를 버티도록 내부 열을 가두는 단열(Insulation)이 엄청나게 잘 되어 있는 편이라고 한다. 보통 창문에 셔터나 커튼 등이 달려있는데 낮에 이 셔터를 완전히 내려서 햇빛을 차단하고 밤에 창문을 열어 찬 공기를 들이면, 에어컨 없이도 실내 온도가 꽤 낮게 유지되는 편이라고 한다. 이 부분은 우리 집과는 좀 먼 나라 이야기긴 하지만 (단열이 잘 안 되는 오래된 집에 사는 중...) 다행히 우리 집은 서향인 데다 바람이 잘 들어서 집에서 움직임을 최소화하면 더위를 크게 느끼지 않는다.
독일은 인구의 절반 이상이 월세(Miete)를 산다. 실외기를 달려면 건물 외벽을 뚫어야 하는데, 집주인 허락은 물론이고 건물 전체 소유주 연합이나 도시 미관 문화재 법적 규제까지 통과해야 해서 과정이 엄청나게 복잡하다고. 내 집이 아니니 내 돈 들여 설치하기도 아까운 것. 이사를 나갈 때는 집을 원상 복구해야 하는 규정도 매우 엄격하다.
독일은 유럽에서도 전기세가 비싸기로 유명하다. 게다가 벽걸이형 에어컨 하나 제대로 달려면 인건비와 설치비만 기본 수백만 원(2,000유로 이상)이 깨지다 보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느끼게 될 수밖에 없다.
기온은 비슷하지만, 지구 반대편 나라에서 맞이하는 여름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독일 여름 날씨도 점점 더워지고 더운 날도 늘어나서 요즘은 이동식 에어컨을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독일이 한국만큼 에어컨 보급률이 높아지려면 아직은 한참은 걸릴 것 같다.
나는 내일도 해가 지기 전까진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을 예정이다.
나의 작은 손풍기와 탁상 선풍기와 함께.
*독일 에어컨 보급률 출처: https://sollero.de/blogs/ratgeber-klimaanlage/klimaanlagen-statistik-2024#toc-section-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