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이다. 캘린더상 1년의 반을 지난 지는 좀 되었지만, 8월이 되자 회사에서 퍼포먼스 중간평가라는 것을 했다. 지난 연말에 세가지의 새해 퍼포먼스 목표를 세웠던 게 있는데 그게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중간점검을 하는 것이라 했다. 지금까지 여기저기서 일해봤지만 이런 류의 중간 평가는 처음이었다. 아니 애초에 작년 연말에 한 퍼포먼스 리뷰부터 낯설었다.
지금까지 회사 생활을 하면서 공식적으로 받았던 건 인사고과 같이 회사가 나를 평가해서 점수를 알려주는 일방적인 통보 뿐이었는데, 지금 이 회사는 여러가지 항목을 정해놓고 내가 나를 스스로 평가하게 했고, 매니저도 같은 항목에 대해 피드백을 해줬다.
업무상 내 성과를 스스로 평가하는 일이 처음이라, 게다가 우리나라도 아닌 외국이라, 무작정 겸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너무 부풀리지도 못하겠고, 결국 안전한 중간 지대를 선택했던 기억이 난다. 그것도 어려웠는데 갑자기 또 그걸 가지고 중간 평가를 하겠다고 한다. 중간 평가도 연말 평가와 비슷했다. 연말 평가보다 양식은 간소했지만, 그 때 설정했던 목표에 대한 나의 커멘트를 적어서 작성해내면 거기에 매니저도 커멘트를 작성해 와서 같이 구두로 면담을 하게 되는 식이었다.
규모가 큰 외국기업에서는 이렇게 셀프 평가를 하는 곳이 있다고는 들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다니는 회사가 그 정도의 규모는 아니라서 처음에는 이런 평가를 한다고 했을 때 조금 과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처음 겪는 평가 시스템이라 당황스러워 했었다.
그런데 막상 작년 말, 그리고 올해 중간 평가를 하다보니 생각이 좀 바뀌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평가를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물론 자본주의의 회사가 대부분 그러하듯이 여기도 KPI에 대한 압박은 있다. 하지만 이 퍼포먼스 리뷰는 숫자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과정을 함께 돌아보고 앞으로의 방향을 이야기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번에 중간평가표를 작성하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평소에는 매일 반복되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몇 달 전 세웠던 목표를 다시 읽고, 그동안의 경험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하자 작은 변화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숫자로 확인할 수 있는 성장도 있었고, 문서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변화도 있었다. 새로운 업무를 배우기도 했고, 다른 팀과 협업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동료들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신뢰가 쌓였고, 내가 가진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기회도 많아졌다.
예전에는 주어진 일을 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 혼자 잘하는 것보다 함께 성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조금씩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중간평가를 작성하면서 또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 우리는 자신이 해 온 일을 생각보다 쉽게 잊어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기록이 중요하다.
새롭게 배운 것, 해결했던 문제, 누군가와 협업했던 경험, 예상하지 못했던 도전까지.
그 모든 경험은 시간이 지나면 쉽게 사라지지만, 기록으로 남겨 두면 성장의 흔적이 된다.
유럽 회사의 평가 문화가 흥미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평가는 과거를 평가하기 위한 절차가 아니라 미래를 설계하기 위한 대화에 가깝다. 회사는 직원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이야기하고, 직원은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성장하고 싶은지 이야기한다. 서로의 기대를 확인하고 다음 단계를 함께 고민하는 것이다.
이번 중간평가를 마친 뒤 자연스럽게 새로운 질문이 떠올랐다.
앞으로 나는 어떤 역할을 맡고 싶을까?
아직 명확한 답을 찾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성장은 특별한 순간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작은 경험들이 쌓여 결국 새로운 방향을 만들어 낸다.
몇 달 뒤 다시 평가서를 작성하게 된다면, 그때는 또 어떤 이야기를 적게 될지 조금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