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꾀병이 아니라구요
최근 몇 주간 일이 평소보다 고되었다. 휴가를 간 동료들, 몸이 아픈 동료들, 그 빈자리가 버거웠던 건지 결국 병이 났다. 몸이 으슬으슬 이상할 때부터 모든 걸 내려놓고 내 몸부터 챙겼어야 했는데, 또 그게 잘 안 되는 사람이라 일은 일대로 인간관계는 인간관계대로 거절을 못하다 보니 몸에 무리가 와버린 것이다.
마침 또 나타나는 증상들이 나만 참으면 남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거라 일주일 정도 잘 숨겨왔는데 도저히 못하겠다 싶은 순간이 되어서야 나의 통증을 털어놓고 회복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평소 다니는 병원에 예약을 잡으려니 방문 예약은 꽉 차서 영상 진료 예약을 잡았다. 의사와 증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상담한 뒤 약을 처방받고 병가를 내기 위해 꼭 필요한 AU(병가증명서)도 부탁했다. 처방전도 병가증명서도 모두 디지털로 이루어져서 예전처럼 종이로 받는 일이 많이 줄었다.
집 근처 약국에 가서 보험카드를 드리면 칩에 저장된 정보로 처방전을 열람해서 약을 지어주신다. 약에 대해 궁금한 점들을 물어보고 집으로 와 나름 건강한 재료들로 차린 밥을 먹고 약을 먹었다. 밥 한 끼 차려먹는 것도 힘들어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있어야 했다. 그래도 회사에 병가 신청을 빼먹으면 안 된다.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 3일의 병가를 알리고, 회사 HR 시스템에 등록하고, 인사팀에게도 이메일을 썼다.
몸이 아플 때는 이 모든 것을 혼자 하는 것조차 귀찮고 힘들지만, 한국에서 아파도 출근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감기몸살로 병가를 내고 일 걱정 없이 푹 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싶다.
물론 독일에는 병가를 쉽게 쓸 수 있다는 점을 악용하는 사람도 많아서 슬롯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기도 하다. 아무리 법으로 보장된다고 해도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지라, 연휴 전후, 주말 전후, 휴가 전후처럼 너무 적절한(?) 시기에 병가를 자주 쓰는 사람들은 '꾀병 부리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생기고 뒤에서 미움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규정대로 병가진단서를 받아 제출하기만 한다면 회사에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어 골치 아픈 회사들이 적지 않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중에서도 정직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특히 한국인처럼 성실함이 몸에 베인 사람들은 때로는 그런 상황이 불공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정말 아파서 병가를 오래 쓰레 되는 경우에도 괜히 회사나 동료 눈치가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평소에 성실하게 일한 이미지가 있다면 다들 이해해 주는 분위기인 것 같다.
나는 한국에서 일한 기간이 더 길어서 아직도 이런 병가를 내는 일이 조심스러운데 이번에도 그래서 고민이 많았다. 처음 3일의 병가를 받고 이 기간 안에 다 회복되기를 바랐지만, 증상이 많이 좋아지긴 했어도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 그럼 여기서 고민이 된다.
'아직 좀 아파도 일단 출근해서 일을 하며 천천히 회복할 것인가'
vs
'완전히 회복한 후 정상 컨디션으로 출근할 것인가'
이런 고민은 비단 한국인이라서 나만 하는 건 아니고 같이 일하는 독일 동료들 중에서도 비슷한 고민을 하는 친구들이 있다. 지금 내 일이 사무직이 아닌 현장직이라 재택근무가 안돼서 더 그런 고민이 된다.
나는 꽤 오래 고민했고 그 고민을 하는 시간조차 피로해질 때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내 몸보다 다른 사람을 더 생각하고 있구나. 애초에 몸이 이상하다 싶을 때, 약속도 취소하고 더 빨리 병가내서 푹 쉬어버렸으면 이렇게 길게 아프지도 않았을 텐데. 왜 당당하게 병가를 쓸 수 있는 독일에 와서도 나는 내 몸보다 회사의 사정이나 지인들의 사정을 생각하며 NO라고 말하기를 어려워하는 걸까?
그래서 이번을 연습하는 기회로 삼기로 했다.
'나는 지금 내 몸의 회복을 최우선으로 한다.'
'내 건강은 나 말고 누구도 바카라임져 줄 수 없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내 몸의 상태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니 나는 지금 다시 한번 NO를 말하고 완전히 회복한 후 복귀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후련해졌다. 매니저에게 연락을 해 이틀 더 쉬겠다는 말을 전했다. 병가를 연장하려면 또 추가로 병가증명서를 받아야 하는데 두 번째부터는 병원에 직접 방문해야 한다고 해서 이번엔 병원을 직접 찾았다. 의사가 빠른 회복에 도움이 되는 영양제도 추천해 주었다.
그리고 이어진 이틀의 추가 병가 기간 동안 정말 오랜만에 마음이 정말 편했다. 그냥 단순히 일을 안 나가도 돼서 편하다는 느낌과는 조금 달랐다. 병가를 내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예전에 병가를 낼 때는 아픈 내가 회사에 폐를 끼치는 것 같은 미안한 마음이나, 혹시 사람들이 내가 꾀병을 부린다고 생각하지는 않을지, 회사에서 내 평가가 떨어지는 건 아닐지, 여러 가지 복잡한 걱정과 우려가 아픈 몸을 더 아프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회복조차도 '빨리'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쫓기듯 회복했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 지금 일하는 회사만 바라볼 게 아니라 더 멀리, 그러니까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도 내 인생을 살아나가야 할 내 인생의 주인으로서 장기적으로 바라보니, 지금 나의 회복을 챙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가 더 또렷하게 보였다. 나는 회사를 그만둔 후에도 이 몸뚱이를 가지고 계속 살아가야 하니까.
물론 여전히 그 경계들은 어렵다. 독일에서도 어쩔 때는 좀 아파도 희생해서 일을 해야 할 때가 있고, 어쩔 때는 아픈 몸으로 나갔다가 괜히 더 민폐가 되는 경우들도 있다.
그래도 최소한 그 애매한 경계 앞에서 나를 항상 희생하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끔은 그 경계를 넘어 나를 우선으로 챙길 수도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게 장기적으로는 나에게도 회사에도 롱런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