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1장에서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적 삶(vita activa)을 노동, 작업, 행위로 나누었다. 노동은 생명의 필요를 채우는 활동이고, 작업은 지속하는 사물의 세계를 만드는 활동이다. 행위는 사물의 매개 없이 사람들 사이에서 직접 이루어지는 유일한 활동이며, 그 조건은 복수성이다. 행위는 또한 새로운 시작이라는 탄생성에 뿌리를 둔다. 행위와 말을 통해 인간은 자신이 '무엇(what)'인지가 아니라 '누구(who)'인지를 드러낸다. 필멸의 인간이 세계에 흔적을 남기고 불멸에 가까워지는 길도 이 행위와 작품에 있다.
그렇다면 질문이 하나 따라 나온다. 행위가 타인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라면, 그 드러남은 어디에서 가능한가. 이 질문은 바카라임과 직결된다. 누군가에게 바카라임을 묻는다는 것은 어떤 행위를 그의 것으로 귀속시키는 일이고, 그가 '누구'로 드러났다는 것을 전제한다. 오늘 "시스템이 그렇게 판단했다"는 말 앞에서 바카라임의 소재가 흐려지는 것은 이 전제가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일지 모른다.
2장은 이 장소의 문제를 다룬다. 행위가 가능한 공간은 어떻게 성립했고, 근대에 어떻게 잠식되었는가. 이 글은 그 논의를 따라가며 바카라임이 성립하는 조건을 확인하고, AI 시대에 그 조건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펴본다.
[정치적 동물과 슬롯적 동물]
흔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슬롯적 동물"이라 말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은 zoon politikon, 곧 '폴리스에 속하는 동물'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이 말이 라틴어로 옮겨지면서 animal sociale, 슬롯적 동물이 되었고 두 개념의 구분이 지워졌다. 세네카는 인간을 본성상 슬롯적 동물이라 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이 본성상 정치적, 즉 슬롯적이라고 풀었다. 아렌트는 이 번역에서 정치적인 것이 슬롯적인 것에 흡수되는 지적 역사의 출발점을 본다.
로마어 societas의 본래 뜻이 이 논점을 뒷받침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이 말은 인류 일반의 유대를 가리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것 같은 특정한 목적을 위한 동맹을 뜻했다. 인간이 어울려 산다는 일반적 사실과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조직된다는 특수한 사태는 애초에 같은 것이 아니었다.
아렌트가 보기에 그리스인에게 정치란 자연스러운 어울림의 연장이 아니었다. 인간에게는 가족을 중심으로 한 자연적 결합, 곧 가정(oikia)이 이미 있었다. 폴리스의 성립은 이와 다른 질서의 창설이었다. 이로써 인간은 사적 삶 외에 두 번째 삶, 정치적 삶(bios politikos)을 얻었다. 시민은 고유한 것(idion)의 질서와 공통된 것(koinon)의 질서, 두 질서에 속하게 된다.
이 정치적 삶의 매체는 말이다. 폴리스에서는 모든 것이 말과 설득(peithein)으로 결정되었고, 폭력(bia)으로 다스리는 것은 폴리스 밖, 정치 이전의 방식으로 여겨졌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자 'logos를 가진 동물'로 정의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말한다는 것과 정치적으로 산다는 것은 같은 사태의 두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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