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의 업무는 개별적으로 보면 복잡다단하고 주제와 범위가 다양하지만, 크게 나누면 남에게서 받는 ‘숙제’와 내가 ‘주도하는 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보통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면 상사로부터 숙제를 받을 때가 많다.
-요즘 이런 게 중요해지는 것 같은데, 한번 검토해 보세요.
-다음 회의 때 이 주제로 한번 이야기해 봅시다.
오랜 회사 생활과는 무색하게 이런 말을 들으면 일단 바빠진다. 관련 자료를 찾고, 필요에 따라 다른 회사는 어떻게 하는지 살펴본다. 상사가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그 의도를 해석하는 것도 중요하다. 의도를 알아야 정리 및 제안의 방향이 의미를 갖는다. 그렇게 며칠 혹은 몇 주를 보내고 나면 그럴듯한 자료가 하나 만들어진다. 숙제를 잘 해낸 것이다.
이처럼 상사가 아젠다를 던진 다음부터 열심히 고민하는 사람은 많다. 내가 그랬다. 누군가 문제를 정의해 주면 그다음부터는 열심히 할 수 있었다(이제는 ‘키워드’만 던져지고 그 정의부터 시작하는 성격의 업무가 점점 늘고 있긴하다만). 항상 그런것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결과물을 만들어 낼 자신도 있다.
문제는 그 앞단이다. 아젠다가 정의되기 전에,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
회사에서 전략 업무를 하며 내가 느낀 핵심은 의외로 단순하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생각의 시작은 현재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어떤 기술이 있는지, 시장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경쟁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직에는 어떤 사람이 있고 얼마만큼의 자원을 쓸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현실을 무시하고 미래만 이야기하는 것은 무바카라임한 상상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현재를 잘 정리하는 것만으로는 전략이라 보기 어렵다. 지금 보이는 작은 변화가 앞으로 무엇을 바꿀지, 지금은 별것 아닌 기술이 몇 년 뒤 어떤 의미를 가질지, 현재 잘하고 있는 일이 앞으로도 계속 중요할지 질문해야 한다. 아직 아무도 답을 요구하지 않을 때 질문을 먼저 만드는 것이 전략 업무의 중요한 부분이다.
사실 어마어마하게 ‘전략’이니 ‘미래 역량’이니 하지 않더라도 그저 주도적으로 아젠다를 정리해 두는 건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특히 일의 주도성을 찾아가는데 그렇다. 얼마 전 팀 업무를 정리하면서 앞으로 몇 달 동안 어떤 아젠다를 제안하고 얘기해 볼 수 있을까 고민을 해봤다. 왜냐하면 언제까지 상사가 시키는 일만 잘 처리하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생각의 방향이 달라지자 다음 달, 그 다음 달, 다다다음 달에 얘기하고 싶은 주제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그걸 적어 내려가자 비로소 나와 팀의 일들이 선명해졌다. 각 주제별로 아직 디테일들을 채워나가야 하는 작업들이 수두룩하지만 어딘가 모를 자신감도 생겼다. 그래, 이렇게 하는게 일이지.
상사의 아젠다가 나보다 더 상위 레벨인 건 당연하다. 조직 전체를 바라보는 리더는 실무자가 보지 못하는 변화를 먼저 발견할 수 있다. 나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문제는 그게 반복되면..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음에도 어느 순간 팀/담당의 역할은 ‘답을 잘 만드는 조직 또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점이다.
아젠다를 먼저 꺼내는 사람이 논의의 출발점을 만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무엇을, 누구와,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 고민한다. 업무의 주도성이란 내가 맡은 일을 나만의 방식으로 해결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먼저 고민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