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말의 시간과 공간을 상상하다가.
시간을 경험할 수 있어서 나는 음악에 끌리는 걸까. 유한한 우리에게 유한을 매 순간 잊지 않게 해주는 아름다움. 찰나의 음 하나에도, 음과 음의 간격에도 감정이 살아 숨 쉴 수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 시간을 무한으로 쪼개는 것도, 끝없이 늘이는 것도 음악으로 알게 하는. 그래서 나는 영원도 경험해 볼 수 있고, 찰나의 스치는 마음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두 편의 전시를 보고 난 뒤늦은 시간, 저녁을 먹고 찾아간 뮤직바에서 오래 앉아 있었다. 그리고 요즘의 관심은 크게 듣는 음악이다. 녹음한 소리의 모든 것들을 선명하게 다 들을 수 있도록 질감이 느껴지는 소리. 그런 것들에 예민한 촉수를 내세우고 있다. 음악이 켜지면 마음이 비워진다. 마음이 비워지면 가벼워지고 가벼워지는 나는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 같다.
악기의 구성이 좋거나 화려하면 할수록 음악은 풍성해진다. 풍성한 음악 속에는 숨어있는 시간이 존재한다. 때로 시간도 숨겨진다는 사실을, 시간의 신 크로노스도 알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것을 찾아내는 기쁨은 음악으로만 가능하다. 풍성한 악기 편성으로 된 음악 중에서도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특히나 협주곡이나 대편성의 교향곡에는 숨겨진 호흡과 시간이 가득하다. 오보에의 독주 파트가 끝나는 시점에 다른 악기가 이를 받아 이어갈 때에는 오보에의 시간을 찾기란 쉽다. 오보에가 숨을 쉬는 시간을. 한참 활을 켜고 멜로디와 화음을 보여주던 바이올린을 든 주자가 활을 잠시 내리고 지휘자의 손을 응시하는 눈에도 여전히 음악의 시간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내 흐르고 있는 음악에 올라타듯 지휘자의 손 끝에 맞추어 팔을 다시 들어 올리는 그 순간. 그 시간의 감각을 맛보면 음악에 둘러싸여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을 잊는다. 그래서, 때로 음악을 이끄는 지휘자는 이 모든 공간과 시간을 움켜쥔 최고의 신처럼 느껴진다.
우연히 세종문화회관 대공연장에서 펼쳐지는 광복절기념 베토벤 9번의 표를 구하게 된 건 정말 조금은 운명 같았다. 집에서 떠나오기 전 하필, 평소에 부러 잘 듣지 않던 합창 4악장을 듣고 난 뒤라서 더욱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취소표로 보이는 것을 공연 당일 오전 세종문화회관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예약을 완료했다는 사실이 나를 조금 들뜨게 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이벤트성 음악회이겠지만 그래도 한여름에 클래식공연을 접하기는 좀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귀하게 여겨졌다. 연말연시가 아니면 언젠가부터 잘 듣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9번을 공연으로 직접 볼 수 있게 되다니,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하루의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실은 세종문화회관에서 진행하고 있는 전시를 보러 가려던 참이었다.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와 관련한 전시로 미국 디트로이트 미술관 걸작선이라고 광고되어 있었다.
요즘 19세기말 그리고 20세기 초로 넘어오는 이 시기의 미술들이 다시 조명되는 시기인지. 도쿄 미쓰비시 1호관 미술관에서 열렸던 전시 "Artists at the Café: From the Impressionists, Van Gogh and Toulouse-Lautrec to Picasso(카페에 모인 예술가들, 인상파부터 반고흐, 로트렉, 피카소까지)"를 8월 초에 보고 왔던 나머지 다시 그 시기를 다시 복기하게 되었다. 19세기말의 전반적인 사상과 예술에 관심을 가졌던 건 비엔나에서 쉴레와 클림트의 그림을 만났던 그 시기였다. 건축에는 오토 바그너 같은 사람이, 음악에는 구스타프 말러 같은 사람이 있었던 그 세기말의 분리파들에 의한 전방위적인 변화 말이다. 같은 시기의 프랑스 파리에서도, 독일 드레스덴에서도 변화는 있었을 것이다. 나는 도쿄의 전시에서는 그 시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캉캉스커트를 입고 물랑루주에서 춤을 추던 화려함 뒤에 오는 우울함과 불안. 커다란 파도가 몰려올 것 같은 폭풍 전야의 나약한 사람들의 감정들을 상상해 본다. 젊음과 방황으로 물랑루주가 탄생했으리라 생각한다. 흔들리는 붉은 불빛이 자꾸만 연상된다. 펄럭이는 치마와 화려한 조명이 연상된다. 그 조명 아래서 싸구려 술을 한잔 들이켠 여자의 술잔엔 립스틱 자국이 짙게 남을 것만 같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인상주의를 넘어:디트로이트 미술관 걸작선> 전시는 조금 친절한(?) 전시였다. 미술 사조에 대한 간단한 설명들과 함께 시기별, 작가별로 조금씩 그림들을 통해 그 시대를 열어 보여주고자 했다. 그래서인지 새삼 유럽의 전반적인 세기말의 분위기를 간단히 조망하는 느낌이었다. 이 시기의 작품 중에서도 나는 쿠르베와 드가의 작품에 언제나 먼저 마음을 빼앗긴다. 정돈되고 정교한 르누아르의 색감은 미소 짓게 만들기에 충분하고. 아름답게 치장된 현실과 신화에나 나올법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닌, 인간 그 자체의 고통스러운 삶을 마다하지 않았던 쿠르베와 드가의 작품은 그래서 거칠지만 연민을 느끼게 한다. 그 시절의 사람들의 고심이 여기에 다 있었을까.
그리고 세잔. 액상프로방스라는 곳을 알게 해 준 화가. '생 빅투아르'라는 산을 가본 적도 없으면서 궁금하게 만든 화가. 세잔의 그림은 어떤 가교(架橋, 다리) 같다. 전혀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한 가교. 그렇지만 이전의 것도 이후의 것도 모두 받아 안는 가교. 그래서 그의 자그마한 산 그림 앞에서 터치를 상상해 보았다. 나는 고흐보다는 세잔이 취향인가 생각했다.
그리고 앙리 마티스와 피카소로 이어지는 입체파의 등장. 모든 것을 해체하고 그 조각을 다시 이어 붙이는 작업. 우리는 추상이라 이야기하지만 이보다 더 정밀하고 내밀한 그림이 있었던가. 공간을 쪼개고 시간마저 뭉개는, 그래서 그곳에서 다시 자신의 시간을 이어가는 그런 그림. 어떤 시간의 흐름이 되려 뚜렷하게 보이는 그림. 형태가 분명하지 않기에 우리는 무엇도 상상할 수 있다. 각자 자신만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처음에는 갸웃하던 그 무너진 형태감은 내 머릿속의 고정관념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아주 날이 잘 선 도끼 같다.
파괴는 생성의 전단계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시간과 공간이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준다.
저녁에 들었던 베토벤의 합창 9번.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른 해석의 합창이기는 했다. 연주는 반듯했고 깨끗했지만 나는 조금 더 극적인 9번을 원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가지고 있던 관념이 또 송두리째 깨지는 연주였달까. 서울시향은 음의 세기로 감정을 드러냈고, 나는 어떤 부분에서는 감동을 받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아쉬웠다. 시간이 가는 순간의 아쉬움이었달까. 조금 더 여유를 두고 천천히 이 시간이 흐르길 바랐던 것 같다.
글을 쓰는 이 순간에 깨닫는다. 19세기 세기말에 어울리는 곡이 9번 합창이다. 19세기말 구스타프 클림트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이 곡에 영감을 받아 "베토벤 프리즈(Beethovenfries)"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그 작품을 보고, 구스타프 말러는 관현악으로 편곡하여 작품 앞에서 연주를 올렸던 적도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은 후에 어떻게 기억될까. 21세기 초반의 혼돈, 모든 것들이 가쁘게 바뀌는 순간, 사람들의 무력함과 고통, 화려한 소비와 추구되는 안락함. 이런 것들일까. 어떤 시대든 그 시대를 관통하는 주제가 있다. 19세기말 20세기초는 전쟁과 재건의 시기였다. 스스로가 만들어놓은 불행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과 그 또한 극복해 보려는 인간의 의지와 다시 무너지기를 반복하는 어리석음까지. 지금의 우리는 어떨까. 그 모든 것들을 스스로 만들고 무너뜨리는 다이내믹한 도시에서, 그 최전방에서 중심을 잃지 않길 바라게 된다. 최전방에서 도망치지도 않길 바라게 된다. 모든 것들은 이 도시에서 생성되었다. 도시는 우리가 무심히 걸어가며 지나는 낯선 사람에게 인사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그 감각에서 만들어진 것 같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최선의 파라다이스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도시의 낡을 콘크리트 건물에서 안온하게 잠들 수 있을 것이다.
덧. 19세기말 비엔나의 제체시온과 관련하여 쓴 글이 있었네요. https://fishingproductfr.com/@navillera/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