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옥’ 일지도 모를 이곳에서 꽃잎처럼 시를 쓴다면.

성동혁의 <아네모네>

by경계선

띠지를 덕지덕지 붙이며 시집 한 권을 읽었다. 읽었다기보다 눈에 바르는 것 같았다. 표지는 크라프트 느낌으로 매끈하지만은 않고, 자칫 모서리가 닳아질까 노심초사했다. 바카라장의 귀퉁이를 접으면 접힌부분만큼 금방 찢어질 것만 같은 가녀린 물성을 가진, 봄날의 바카라에서 나온 성동혁의 시집 <아네모네(2019)>였다.


제법 단정한 동네 서점에서 알게 된 시집이어서 더 특별했는지는 몰라도.

문장에서 다가오는 힘과 터지는 듯한 감각적으로 배치한 단어들은 시가 될 수 없었을 것만 같은 단어들도 모두 시로 만들어버린 것만 같았다. 읽은 지는 6개월이 넘었는데도 나는 이 시집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복기하지 못하고 오늘까지 온 이유는, 괜한 질투였을까. 나는 시가 되지 못한 말을 줍는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시가 될 수도 있었던 낱말들을 내가 줍는 바람에 색이 바래졌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의 시들을 읽고.


이름만 알아서 더 사랑할 수 있는 것들
별
달
꽃
검은 곳에서 빛나는 것들
그러나 검정 바깥에 서야 보이는 것들
먼발치에서도 누구나 사랑을 느끼고
포기할 수 있는 것

-바카라 13쪽, <글피 다시 너에게> 중에서.


이름도 알 수 없는 것들에게 마음을 빼앗기며 뜬구름 잡던 나날들, 나는 그렇게 색이 바래져 가지만 알 수 없는 단어들을 모아 시가 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해야지, 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이름만 알아서 더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이 얼마나 큰 마음으로 다가오던지. 나는 아는 것이 많을수록 사랑할 수 있다고 외쳤던 건 아닐까 그런 서늘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경계선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시詩가 되지 못한 낱말들을 줍고 있습니다. 주운 낱말로 문장을 씁니다. 그 문장은 생각의 수단임을 믿고 있습니다.

2,002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2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14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카지노 게임의 이전글대체로 대도시를 좋아합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