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흔적, 그림과 음악 예술을 향유하는 곳.
집을 나서기 전 들었던 음악은 도쿄에서 중고로 구해온 푸르트뱅글러의 오래된 녹음, 그중에서도 4악장이 턴테이블 위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낮은 해상도의 음질, 오래된 녹음이자 심지어 실황이어서 그런지 여러 잡음들이 턴테이블 위의 먼지들과 엉킨 듯 아주 오래된 축음기에서 나오는 음악처럼 아련했다. 천천히 시작하는 4악장의 천둥 같은 첫 음의 임팩트가 크지 않아 역시 당시의 리코딩 기술은 어쩔 수 없었겠다 생각하며 짐들을 챙겼다.
비가 시작될 모양인지 하늘은 개운치 못했지만 더위에 지쳐가던 시간들 틈바구니에서 오히려 햇빛 없는 날씨가 반가웠달까. 숙소에 차를 대고 짐을 던져두고는 거리로 나서니 비가 쏟아졌다. 택시를 급히 잡아타고 서울시립미술관으로 갔다. 이번 서울행의 가장 큰 목적은 유영국의 전시였다. 한국 추상 회화를 김환기로 입문했다면 그다음에 눈에 들어올 작가로 유영국은 예정에서 빠짐이 없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몇 점씩 만나보긴 했었는데, 언젠가의 나는 그의 그림을 다시 찾을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과천에서 우연히 만난 그의 작품 몇 점을 나는 몇 년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대규모 전시라니! 초기작부터 마지막 작품까지. 그리고 심지어 무료인 이 전시. 전시장은 북적였지만, 오히려 기분이 좋았달까. 언젠가부터 재조명되고 있는 우리나라 근대 미술(20세기 초반)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될 날이 더 앞당겨지고 있달까.
몇 해 전 도쿄의 우에노 지역에 있는 "국립서양미술관"을 갔을 때의 그 시무룩한 마음을 잊을 수가 없다. 1900년대, 우리의 고혈을 짜내 성장했던 일본제국. 고베에 설립한 가와사키 조선소를 만든 마쓰가타 가문이 1차 대전 때부터 막대한 부를 쌓았던 그 메이지 시대의 실세 중 한 명이었다. 그 가문이 그때 수집한 서양 미술작품의 규모는 어마했다. 이후 역사적 상황 및 2차 대전 패전국이 되면서 이 컬렉션을 프랑스에서 몰수했는데, 이후 프랑스가 일본 정부에 넘겨주면서 미술관을 건립했다. 그런데 건물을 무려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했다는 사실이 또 한 번 놀람의 포인트였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진지하게 한일관계를 고민해 보거나 전공해보지 않으면 일반인의 입장에서 일본이 우리보다 앞서있었던 많은 부분에 놀라게 된다. 우리나라가 풍비박산이 나던 그때, 일본의 호황과 부유함의 흔적을 지금에 와서 막상 목도하면 더 열이 받는달까.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사람.) 나는 열받는 일본의 도쿄를 왜 계속 가고, 가서 또 서양미술관을 가게 되는지. 그러고도 나는 1900년대 초중반 일본의 지식인들이 가졌을 허무주의와 패배감, 그리고 양심에 의한 고통 등에 대해 모르지는 않는다. 많은 작가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무력함에 시달렸을 그 일본제국의 무자비함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래서 무언가에 대해 맹목적으로 미워하기도 어렵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일본과는 완전히 다르게 어려웠던 나라살림만큼이나 우리의 근대 미술이 이렇게 눈물겨운 의지와 고통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어쩔 수 없다가도, 이토록 고통 속에서도 아름다운 작품들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또 역설적으로 자부심이 들고, 나는 또다시 어쩔 수 없이 국뽕에 가득 찬 대한 국민인가 생각하게 된다.
과거를 알게 되는 것은 바카라으로만 가능하지 않다. 오히려 과거를 제대로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그 시대의 예술이었다. 언젠가의 예술들을 즐비하게 꾸려놓은 도시를 자연경관보다 더 사랑하는구나, 나는 옛날 사람을 사랑하는구나,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하고 싶어진다. 도시는 사람이 살아간 흔적이 가득한 곳이어서 나는 아마도 그 온기를 느끼러 북적이고 시끄러운 도시를 찾으려 하는 것만 같다.
유영국의 전시를 보았다면, 이대원도 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그럴만했다. 거리도 가까우니 바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덕수궁으로 향했다. 같은 시절, 같은 선생님께 배웠다던 두 화가의 화풍은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그 같은 선생님이라고 하는 분은 일본인 미술선생님. 조선의 도자기를 아꼈다던 그 미술선생님. 일본에게 나라를 넘기는데 일조했던 사람들을 우리는 민족반역자라고 부른다면, 일본인에게 배웠다고 해서 모두 친일이라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더 오롯이 남기기 위해, 그들의 화풍에 울진의 산을 표현하고(유영국), 서울의 북한산을 표현(이대원)하고, 자신이 살았던 파주의 농원과 들판을 표현했다면. 그래, 그랬다면.
생각보다 더 좋았다. 유영국의 산에서 보여주는 색감과 단순화되는 그의 터치가, 무언가 정돈되는 느낌이었다. 눈에 보이는 보통 사람들의 삶, 그대로를 그리는 분위기(사실주의)와 화가의 눈에 느껴지는 인상과 환상으로 형태감만 남기다가(인상주의/후기인상주의) 그 형태도 사라지는 큐비즘(입체주의)으로 갔던 피카소의 시절, 그렇게 격동했던 예술의 시기에 우리의 미술이 흐름에 조심스럽게 무게중심을 잃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게. 이대원의 초기 그림에서 조금 더 질긴 터치감과 어두운 색감으로 갔으면 19세기말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방황했던 에곤 쉴레와 닮기도 했었다 그런 우스운 상상도 해보면서. 그렇지만 이토록 밝고 행복한 그림의 이대원의 농원들의 그림에서 누구도 연상되지 않았던 존재감에서 나는 그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을 산바카라하는 듯 듯 느껴졌다.
농원을 산바카라하는 듯 자연에 기댄 마음을 좋아한다 여겼던 나는, 도시 생활자로서 도시에서 이런 그림들을 실컷 보며 음악을 듣고 싶다 생각하던 연휴였다. 하이파이 오디오를 들여야겠다 생각하고, 더 많은 전시와 예술을 가까이해야겠다 생각했다 생각했던 연휴였다. 시지프스의 돌 같은 삶이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라 생각하면서, 더 큰 도시에서 살고 싶다는 유혹을 잠시 느낀 오후. 아직, 예정에 있던 전시 한 편이 더 남아있다는 사실과, 우연히 구할 수 있게 된 서울시향의 베토벤 9번 공연에 가게 될 줄은 몰랐던, 이 대도시에서의 여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