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수습한 뒤에 말하려고 했습니다

수습하려고 벌어둔 시간은 어떻게 기록되는가

byNARRIVO

자기소개서에는 실패 경험을 묻는 항목이 자주 등장합니다.

무언가를 잘못 판단했던 경험이나 목표를 이루지 못했던 경험, 계획대로 되지 않았던 일을 적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써보면 실패한 순간은 아주 짧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고 나면 곧바로 그다음으로 넘어갑니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돌아봤고, 어떻게 수습했으며, 이후 무엇을 바꿨는지까지 씁니다.


실패를 물었는데 더 길게 쓰는 건 실패 이후입니다. 잘 쓴 답안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미 끝난 사건이라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고 있고, 원인도 수습한 결과도 압니다.

자기소개서가 좋아하는 실패는 완결된 실패입니다. 실패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편하게 여기는 형식이 그대로 들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소개서에서는 실패라고 부르는 경험도 실제 회사에서는 작은 판단 착오나 실수에서 시작됩니다.

아까 보낸 메일에 틀린 수치가 들어가 있었다는 걸 방금 알아차렸다고 해 보겠습니다.

몇 명이나 잘못된 자료를 봤는지는 모릅니다. 다른 팀까지 영향을 받았는지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고치면 끝나는 일인지, 고객에게 설명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자기소개서에서는 결말을 알고 실패를 설명했습니다. 회사에서는 상황 파악도 제대로 못한 채 입을 열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하기 전에 조금만 정리하고 싶어집니다.

지금 보고하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입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시간을 벌면 한 문장을 더 붙일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제가 잘못했는데 수정했습니다."

같은 사건인데 말하는 사람의 위치가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그냥 사고 친 사람이지만, 수습하고 나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메신저 창을 열어놓고도 보고하지 않습니다.

팀장님에게 몇 줄을 썼다가 지웁니다. 먼저 수정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다시 파일을 엽니다. 수치를 고치고, 다른 곳에도 같은 문제가 있는지 확인합니다.

다시 메신저로 돌아옵니다. 이제 조금 더 정확히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한 군데만 더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것까지 보면 적어도 질문을 받았을 때 대답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실수를 바로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언제나 두려움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서사가 완성되기를 기다립니다. 사고 친 사람으로 나타나기보다 사고를 발견하고 처리한 사람으로 말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회사에서의 사고는 그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혼자 수습하는 동안 잘못된 자료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다음 작업이 시작됩니다.

가장 좋지 않은 경우에는 내가 말하기 전에 다른 사람이 먼저 발견합니다. 그 순간 질문이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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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발견한 사람이 묻습니다.

"어디가 잘못된 거예요?"

그런데 내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질문 하나가 더 붙습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때부터 사람들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오전 10시 : 잘못된 자료를 보냄
오전 10시 20분 : 오류 발견
오전 11시 : 다른 사람이 같은 오류 발견

이제 평가받는 건 잘못된 자료 하나만이 아닙니다. 10시 20분부터 11시까지, 그 40분도 함께 평가받습니다.


실수에는 원래 크기가 있습니다. 얼마나 큰 금액이 틀렸는지, 몇 명에게 영향을 줬는지를 따집니다. 그런데 보고를 미루는 순간 여기에 길이도 생깁니다.

얼마나 오래 알고 있었는가. 알고도 얼마 동안 혼자만 가지고 있었는가.


그 길이만큼 해결의 선택지는 줄어듭니다.

오류를 발견한 순간 알렸다면 팀장은 고객에게 먼저 연락할 수도 있었습니다. 다른 팀이 그 자료를 쓰기 전에 작업을 멈출 수도 있었죠.

하지만 혼자 수습하는 동안 그 선택지는 하나씩 사라집니다. 나에게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했던 시간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해결할 수 있었던 시간을 잃은 셈입니다.


같은 40분이 전혀 다르게 기록됩니다.

나는 수정하느라 쓴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상대는 알고도 말하지 않은 시간으로 기억합니다.

완결된 서사를 만들려고 벌어둔 시간이 그대로 침묵한 시간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이 기억은 그 사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음에 이 사람에게 중요한 일을 맡겼을 때 문제가 생기면 언제 알 수 있을까. 문제가 작을 때 알게 될까, 혼자 해결할 수 없어진 뒤에야 알게 될까.

한 번의 실수는 지나가지만, 그때 생긴 불안은 남습니다.



실패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보통 끝난 사건을 꺼냅니다. 원인을 알고 결과도 확인한 뒤에야 말할 수 있는 형태가 되죠. 자기소개서의 실패도 그런 형식이었습니다.

하지만 회사에서 사람에 대한 판단은 그 실패가 아직 끝나지 않았을 때 이미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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