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반하는 시간

'봉' 잡았다.

by빛나다온

요즘 헬스장에는 공기의 밀도를 바꾸려는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하다. 외투의 무게를 덜어낸 자리마다 생동감 넘치는 눈빛들이 차오르고 공간을 채운 빠른 리듬은 멈춰있던 내 세포를 깨우는 신호탄이 된다. 신나는 비트에 맞춰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기며 내가 이토록 몸을 움직이는 이유를 되짚어 본다.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근력의 뿌리는 유년 시절 자연이라는 광활한 놀이터에 있다. 강과 산, 들판을 경계 없이 누비던 소녀는 민물뱀장어와 제철 과실을 따 먹으며 다람쥐처럼 나무를 탔고 메뚜기를 쫓으며 대지를 달렸다. 그래서 다람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계절이 바뀌어 논바닥이 얼어붙으면 동네 남학생들과 축구를 하며 놀던 골목대장이었다. 그 시절 몸으로 익힌 생동감과 호기심은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는지 성인이 되어서도 새로운 운동을 마주할 때마다 기분 좋은 설렘으로 꿈틀대곤 한다.


수영의 정직한 저항을 시작으로 요가, 에어로빅, 스피닝, 셔플댄스, 라틴댄스까지 다양한 운동을 경험해 왔다. 그렇다고 그 운동들을 다 잘하는 건 아니다. 그렇게 쌓여온 시간 속에서 내 인생의 가장 짜릿한 터닝포인트는 단연 폴댄스였다. 우연히 눈에 들어온 폴댄스 무료 체험 전단지 한 장. 그 전단지는 마치 운명처럼 다가왔다. 지금까지의 운동 여정을 보상이라도 해주듯 나를 새로운 세계로 초대하는 특별한 행운의 신호 같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선 스튜디오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건 강사님이었다. 군살 하나 없이 탄탄한 라인과 화사한 미소는 조명보다 더 빛났다. 특히 그녀가 입고 있던 파스텔 톤의 폴웨어는 건강미 넘치는 피부색과 완벽하게 어우러져 운동복이라기보다 하나의 화려한 무대 의상처럼 보였다. 나도 언젠가 저런 당당하고 아름다운 실루엣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동경이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올랐다.


강사님은 반가운 인사와 동시에 나의 근력 테스트를 해보겠다고 하셨다.


"봉을 잡고 천장까지 올라가 보실래요?"

"네? 제가요?"


당황했지만 다람쥐 별명 짬밥이 어디 가랴 싶어 덥석 봉을 잡았다. 하지만 손바닥에선 진땀이 났고 봉은 장어처럼 미끄러웠다. 힘으로 겨우 겨우 중간쯤 올랐을까 강사님은 내 속도 모르고 '더더더'를 외쳤다.


"더더더~ 잘할 수 있어요. 잘하시네요. 더더더 올라가 보세요."

"더요? 못해요.ㅠ"


발밑의 바닥은 마치 천 길 낭떠러지처럼 아득했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손이 덜덜 떨리고 오금이 저려왔다. 결국 버티다 못한 나는 녹아내리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처럼 봉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바닥에 착지한 순간 오기가 발동했다.


"잘 올라가시는데요? 원래 처음에 중간도 못 올라가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에요. 너무 잘하셨어요. 폴댄스 배우시면 잘하실 것 같은데요?"


칭찬에는 누구나 약한 법. 기쁜 마음에 비싼 수강권 결제를 그렇게 하게 되었다.(강사님의 큰 그림이셨을까?)


사실 내가 폴댄스에 매료된 건 단순히 화려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중력을 거스른 채 오로지 자신의 팔과 다리 근육의 힘만으로 폴 위에서 유연하게 유영하는 강사님의 시범을 본 순간 정적인 요가나 격렬한 댄스와는 또 다른 '강인한 우아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내 몸의 한계를 시험하며 그 높은 곳까지 스스로를 끌어올려 보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나를 폴의 세계로 이끌었다.


폴댄스는 단순히 매달리는 걸 떠나서 컨택(Contact)이라 불리는 피부와 폴 사이의 치열한 마찰, 그리고 중력을 거슬러 오르기 위해 손의 힘뿐 아니라 전신의 텐션으로 버텨내는 그립(Grip)의 미학이다. 다리로 폴을 단단히 조여 올라가는 '클라임(Climb)'부터 오금으로 폴을 걸어 버티는 '니 훅(Knee Hook)', 초급반일 땐 마침내 허벅지 안쪽의 마찰과 코어의 힘으로 몸을 고정한 채 두 손을 놓는 '싯(Sit)' 동작에 성공했을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온몸에 훈장처럼 남는 시퍼렇게 번지는 멍들. 그것들은 내가 나의 한계와 맞섰다는 정직한 영수증이었다.


한편으로는 수많은 동작명이 영어로 불리는 것이 조금은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몸으로 익히는 운동인만큼 더 직관적이고 와닿는 우리말 이름으로도 불릴 수 있다면 그 감각과 의미가 더욱 또렷해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런데 고비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고급반으로 넘어갈 무렵 꿈의 동작이라 불리는'아이샤(Ayesha)'에 도전하다 어깨를 다치고 만 것이다. 거꾸로 매달려 오직 두 팔에 의지해 몸을 지탱해야 하는데 중심이 무너지며 부하가 걸렸다.(덕분에 다이어트 의지만 불타올랐다.)그리고 무엇보다 폴웨어(Pole Wear)들을 장롱 속에 썩혀야 한다는 것도 속상했다.


폴댄스를 안 했다면 이 나이에? 내가? 언제? 어디서? 이런 옷을 입어볼까? 일상생활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과감한 디자인과 핫한 컬러들 하지만 폴 위에서 이 옷들은 노출이 아니라 장비이자 자신감의 결정체다. 피부 마찰이 없으면 폴에 매달릴 수조차 없으니 이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생각한다.


거울 앞에서 핫한 폴웨어를 입었을 때 느껴지는 당당함. 나를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는 이 옷을 입고 있을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힙하고 섹시한 사람이 되는 착각이 든다. 운동할 때가 아니면 언제 또 이렇게 당당하게 입어볼 수 있을까? 강제로 폴을 잡지 못하게 된 그 몇 달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이 차가운 봉에 얼마나 중독되어 있었는지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폴 앞에 서서 차가운 폴의 촉감이 닿는 순간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폴 위에서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섹시함이 아니다. 그것은 코어의 단단함과 유연한 사고가 결합된 아름다운 투쟁이다.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뒤집어 볼 때 비로소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나를 만난다.

이토록 땀 흘리며 몸을 움직이는 이유는 '내가 나에게 반하기 위해서'다. 중력에 순응하지 않고 단 1초라도 더 오래 버티려고 발버둥 치는 내 의지가 대견하다.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고통 속에서도 끝내 동작을 완성하는 나를 확인할 때 타인의 박수가 아닌 스스로의 인정에 전율한다. 오늘도 나에게 반하기 위해서 차가운 폴에 살을 맞대본다.






#운동

#봄

#폴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