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이 빗나간 자리마다 여운이 머물렀다
https://www.youtube.com/watch?v=dpnTd9Dx2OM
씨앗들의 추억은 과육으로 뒤덮여 있다.
복숭아를 베어 물면 가장 먼저 닿는 것은 달콤한 살이다. 혀는 부드러운 것을 기억하고, 이빨은 단단한 것을 피해 간다. 씨앗은 그 모든 단맛이 사라진 뒤에야 모습을 드러낸다. 크고, 단단하고, 끝내 먹을 수 없는 것이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다.
사건의 씨앗은 점점 작아지고, 그 주변의 과육만 이상하게 불어난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은데 창문으로 들어오던 오후의 빛은 기억난다.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는 잊었는데 식탁 위 국그릇의 금 간 자국은 선명하다. 가난했던 시절의 저녁밥에서는 유난히 김이 많이 나고, 슬펐던 날의 하늘은 대체로 지나치게 파랗다.
풍경의 대부분은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하다. 누군가는 눈을 감고 있고, 누군가는 화면 밖으로 반쯤 밀려나 있다. 사진 속에는 분명 내가 있는데, 그날의 나는 없다.
한 장에는 바다가 있다. 수평선은 비뚤어졌고, 화면 아래에는 누군가 벗어놓은 슬리퍼 한 짝이 걸쳐 있다. 사진을 찍기 직전까지 누가 그것을 신고 있었는지, 왜 한 짝만 벗어두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웃고 있는 얼굴은 남았지만 왜 웃었는지도 알 수 없다. 반대로 그 시절 나를 괴롭혔던 걱정들은 사진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우리는 거대한 사건보다 사진 구석의 슬리퍼 한 짝을 오래 기억한다. 사랑했던 사람의 목소리는 잊으면서도 그 사람이 식당에서 물티슈를 접어두던 모양은 기억한다. 인생은 중요한 것부터 사라지는 게 아니라,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던 기준부터 먼저 잃어버리는지도 모른다.
사진은 이상한 증인이다. 있었던 것을 보여주지만, 있었던 일의 전부를 증언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순간에는 손을 떨고,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은 흐리게 찍어놓고, 별것 아니었던 빛 하나에는 지나치게 노출을 준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 엉성한 결과물을 오래 들여다보며 그날이 이랬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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