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비밀번호를

1부 기억은 숫자를 잊고 기억으로만 열린다.

by적적

https://www.youtube.com/watch?v=QMy20AjUBGA

아직 선선하다고 혹은 이제 선선한듯하다고 느낄 때 플레이를 눌러줘


비밀번호를 잊어버린 그녀가 퇴근할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겠다고 했다.



문은 닫혀 있었고, 잠금장치는 아무 감정도 없이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숫자는 여전히 맞는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기억은 그 앞에서 길을 잃었다.


흔히 문이 사람을 막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문은 아무도 막지 않는다. 문은 단지 자신을 열 수 있는 기억을 기다릴 뿐이다.


천천히 오라는 말도 없었다. 그 말을 받을 번호도 없었다. 휴대전화가 없는 사람은 연락이 끊긴 사람이 아니라, 세상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지름길에서 조용히 걸어 나온 사람처럼 보인다.



모든 사람이 손바닥 위에서 시간을 접어들고 다니는 동안, 그녀는 시간을 다시 길 위에 펼쳐 놓았다. 그래서 기다림은 그녀에게 낭비가 아니라 이동이었다.



핸드폰이 없는 그녀.

실밥도 없는 그녀.



실밥은 옷을 붙잡아 두는 가장 가느다란 증거다. 그것이 없다는 것은 단정하다는 뜻이 아니라, 오래전에 풀린 것을 다시 꿰매려 하지 않았다는 뜻처럼 들렸다.



어떤 관계는 끊어진 뒤에 매듭을 만들고, 어떤 관계는 실밥 하나 남기지 않은 채 끝난다. 끝났다는 사실보다, 어디서 끝났는지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오래 사람을 붙든다. 그녀는 접어 둔 페이지 같았다.



끝까지 읽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어느 날 바카라갈피만 끼워 둔 채 잊힌 페이지. 시간이 흐를수록 종이는 바래고 접힌 자국은 더 선명해진다.


읽지 않은 문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읽힌 문장보다 오래 남는다. 끝내 발음되지 못한 문장들은 기억 속에서 자기만의 목소리를 갖기 때문이다.



기억은 바카라장이 아니라 바카라갈피를.....

무엇을 기억하는지가 아니라 어디에서 멈추었는지를 기억한다.



사람은 사건보다 순간을 오래 품는다. 이별보다 마지막 눈빛을 기억하고, 계절보다 창문으로 들어오던 냄새를 기억하며, 이름보다 이름을 부르기 직전의 망설임을 기억한다. 비밀번호도 그런 종류의 기억이었는지 모른다.



숫자는 머리에 저장되지만, 손끝은 그 숫자가 만들어지던 계절을 함께 기억한다. 어떤 사람은 생일을 암호로 삼고, 어떤 사람은 오래된 집 전화번호를, 또 어떤 사람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주소를 암호로 남긴다.



비밀번호는 숫자의 조합이 아니라 과거를 접어 넣은 작은 서랍이 된다.



문제는 시간이 서랍의 모양을 조금씩 바꾼다는 데 있다.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자란다.



처음에는 선명했던 숫자가 희미해지는 대신, 그 숫자를 만들던 오후의 햇빛이 또렷해진다.



여섯 자리는 사라졌는데 창문을 스치던 바람은 아직 남아 있다. 날짜는 잊었는데 그날 마시던 커피의 쓴맛은 혀끝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번호는 버리면서 침묵을 간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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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 이라는 이름의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어요. 훔치고 싶은 문장을 파는 가게를 운영 중입니다. 프로필은 당신과 나 사이엔 너무 긴 설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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