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그저 묵묵히 살아야만 할까요. 물론 태어난 집안이나 성별, 계급, 그 시대가 한 사람에게 기대하는 역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 사는 일이 조금 편할지도 모릅니다.
오래전부터 이런 말이 싫었습니다. “원래 그런 거야.” “여자는 이 정도면 돼.” “이 나이에 뭘 또 시작해.” 그런 말을 들으면 금세 마음속에서 한마디가 올라왔습니다.
왜 꼭 그래야 하지?
저는 아마도 주어진 자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에 오래전부터 거부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역할도, 오래 살아왔다는 이유만으로 굳어 버린 삶의 방식도 꼭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으면서 네흘류도프의 변화가 자꾸 눈에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네흘류도프와 카츄샤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읽다 보니 두 사람의 사랑이나 비극보다, 귀족으로서 당연하게 살아오던 한 사람이 자신이 속한 세계와 자신의 삶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과정이 더 크게 보였습니다.
그는 카츄샤와 다시 만난 뒤,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겼던 삶을 더 이상 이전처럼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그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새로운 삶을 꿈꿔서가 아니라, 더 이상 과거를 모른 척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네흘류도프가 카츄샤에게 준 상처도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잘못을 깨달은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미안해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할까요. 아니면 그때부터라도 사는 방식을 바꾸어야 할까요. 『부활』을 읽는 내내 그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레프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쓴 러시아 작가입니다. 카잔대학교에 입학했다가 대학 교육에 실망해 자퇴했고, 고향에서는 농민들의 생활을 개선해 보려고 애썼습니다. 학교를 세우고 교육 활동도 했습니다. 말년으로 갈수록 종교와 슬롯제도,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그 무렵인 1899년 『부활』을 발표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러시아정교회를 비판한 일로 1901년 파문당하기도 했습니다.
『부활』을 쓴 사연도 톨스토이다웠습니다. 당시 러시아 정부의 탄압을 받고 있던 두호보르교도들의 이주를 돕기 위해 그는 『부활』의 집필을 서둘렀고, 출판 계약으로 받은 돈을 그들의 이주비에 보탰습니다.
한동안 자신의 작품에 저작료를 받지 않던 원칙까지 깨면서 마련한 돈이었습니다. 사람의 양심과 바카라임을 말한 소설이 작가 자신의 행동과도 이어져 있었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톨스토이는 작품 속에서만 옳은 말을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네흘류도프는 처음부터 본받을 만한 사람으로 나오진 않습니다. 젊은 날 카츄샤를 좋아했지만 결국 자기 욕망을 앞세웠고, 그녀를 떠난 뒤에는 귀족으로 별 부족함 없이 살아갑니다. 시간이 흐른 뒤 그는 배심원이 되어 법정에 나갑니다. 그리고 피고석에 앉아 있는 카츄샤를 발견합니다.
자신에게는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이 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다시 나타난 것입니다. 자신이 떠난 뒤 카츄샤의 삶이 어떻게 무너져 갔는지를 마주하게 된 순간, 네흘류도프는 더 이상 과거를 모른 척할 수 없게 됩니다.
『부활』을 읽으며 선명하게 남는 장면이 있습니다. 카츄샤가 네흘류도프가 탄 기차를 뒤쫓는 순간입니다. 카츄샤는 있는 힘껏 달리지만 기차는 점점 멀어집니다. 한 사람은 떠나고, 한 사람은 그 자리에 남습니다.
그 장면이 두 사람의 삶이 갈라지는 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네흘류도프에게는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진 과거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카츄샤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일 이후 그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상처를 준 쪽은 별일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 받은 쪽은 그 일을 오래 기억합니다. “그럴 뜻은 아니었어”라고 말해도 소용없는 때가 있습니다. 무슨 뜻으로 했느냐와 실제로 무엇을 남겼느냐는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네흘류도프가 법정에서 카츄샤를 보며 견디기 힘들었던 것도 그래서였을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오래전에 잊힌 일이었지만, 카츄샤에게 남은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을 마주한 뒤부터 네흘류도프의 시선은 바깥에서 자기 안으로 향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느꼈지만, 가만히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다가 뜻밖의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최근 들어 사람들, 특히 오늘 공작과 소피야 바실리예브나와 미시와 코르네이에게 느낀 혐오가 다름 아닌 스스로에 대한 혐오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자신의 비열함을 인정하는 그 감정 속에 병적이면서도 기쁨과 위안을 주는 무언가가 있다는 점이었다.”
- 『부활 1』, p.223
이 문장을 읽고 네흘류도프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남을 미워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밑바닥에는 자기 자신을 향한 혐오가 있었습니다. 결국 다른 사람에게 향하던 불편한 감정이 자기 잘못을 바라보는 쪽으로 돌아선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은 자기 잘못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남의 잘못을 찾아내는 데 훨씬 능합니다. 저 또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일이 잘못되면 먼저 이유를 찾습니다. 그때는 상황이 그랬다거나, 나도 어쩔 수 없었다거나, 상대도 잘한 것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은 조금 편해집니다.
그래서 톨스토이가 쓴 ‘기쁨과 위안’이라는 문장이 더 눈에 들어왔습니다. 자기 비열함을 인정하는 순간에 어째서 위안이 있었을까요. 아마 더 이상 자신을 좋게 꾸며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잘못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홀가분함은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부활』을 읽다가 뜻밖에도 플라톤의 『국가』를 생각했습니다. 처음 『국가』를 읽었을 때부터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플라톤은 사람의 성향과 능력에 따라 통치자와 수호자, 생산자의 역할을 나누고, 각자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때 정의로운 국가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물론 이것을 태어난 신분에 따라 삶이 결정되는 제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사람마다 가장 알맞은 자리와 역할이 따로 있다는 생각은 편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누가 내 자리를 정하지?’
오래전부터 누군가 삶의 자리를 미리 정해 놓는 말을 들으면 반발심부터 생겼습니다. “원래 그런 거야.”라는 말도 그랬습니다. 들을 때마다 속에서 한마디가 올라왔습니다. 왜 꼭 그래야 하지?
아마 살아온 경험 때문일 것입니다. 대학에 들어가던 1970년대에는 딸이 꼭 대학까지 가야 하느냐고 생각하는 집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에는 대학에 보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가겠다고 버텼습니다. 그
때 큰오빠가 나섰습니다.
“막내는 공부를 잘하니까 대학에 보내야 된다.” 라고 부모님을 설득해 주었고,
그렇게 대학에 갔습니다.
돌이켜보면 지금은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대학에 가지 않았다면 삶은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바카라을 읽고 글을 쓰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나이가 들어 다시 공부하겠다고 학교 문을 두드린 일도 어쩌면 없었을지 모릅니다..
지금도 누군가 “여자니까”, “나이가 있으니까”, “이제 와서 뭘 하려고 하느냐”고 말하면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습니다. 그럴 때면 문득 <필경사 바틀비>의 바틀비가 떠오릅니다. 무심히 말하면서도 자기 선택만큼은 굽히지 않았던 그처럼, 저도 속으로 대꾸합니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남이 정해 놓은 자리에 맞춰 사는 일, 나이나 성별이 제 삶의 한계를 정하도록 내버려 두는 일만큼은 저도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나중에 칼 포퍼의 『열린 슬롯와 그 적들』을 읽으면서 『국가』를 읽을 때의 답답함이 어디서 왔는지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포퍼는 플라톤의 이상국가를 거세게 비판했습니다. 물론 그의 플라톤 해석에는 반론도 많습니다. 어느 쪽의 철학적 해석이 완전히 옳은가보다 다른 데 관심이 갔습니다. 『국가』를 읽으면서 무엇을 싫어하는 사람인지는 분명히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꼭 동의하면서 바카라을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바카라과 싸우듯 읽다가 저만의 생각을 발견한 적이 많습니다.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하고 반박하다 보면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드러납니다. 『국가』가 제게는 그런 바카라이었습니다.
『부활』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카츄샤를 다시 만난 뒤 네흘류도프는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자기 세계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한 여자에게 저지른 잘못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죄수들과 농민들을 만나면서 문제가 점점 커집니다. 감옥과 재판, 가난과 토지, 귀족의 생활까지 이어집니다. 새로운 세상이 생긴 것은 아닙니다. 원래 그곳에 있던 것들입니다. 이제야 보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어느 순간 그는 감옥의 현실과 귀족들의 생활을 나란히 떠올립니다. 가난해서 주인의 숲에서 나무를 베었다가 감옥에 간 사람, 영양실조로 죽어 가는 아이, 그리고 그 한편에서 아무렇지 않게 사치를 누리는 사람들의 삶이 서로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따로 떨어져 있던 현실이 하나로 이어지자, 자신이 살아온 세계도 전과는 다르게 다가옵니다.
네흘류도프는 감옥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관리들의 태도를 보면서 이런 생각도 합니다.
“그 모든 사람들이 가장 소박한 연민의 감정조차 스며들지 않을 만큼 둔감했던 것은 단지 그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직무를 수행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인간애가 스며들지 않았던 거지. 포장된 땅에 비가 스며들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야.”
- 『부활 2』, p.256
‘포장된 땅에 비가 스며들지 못하는 것처럼.’ 이 비유는 인정하기 싫을 만큼 정확했습니다. 나쁜 사람이라서 잔인한 것이 아니라, 자기 역할에 충실한 나머지 정작 눈앞의 사람과 그 고통을 놓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은 감옥에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교도관은 죄수를 한 인간이 아니라 관리의 대상으로, 관료는 사람을 서류 속의 한 건으로, 교사는 아이를 성적으로만 볼 수도 있습니다. 자기 역할에 충실한 나머지 정작 그 일 속의 사람을 놓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다음에 나오는 말이 더 묵직합니다.
“인간들 사이에 오가는 사랑이 인간 생활의 근본적인 법이기 때문이지. 사실 일은 억지로 해도 사랑은 억지로 할 수 없어. 그렇다고 해서 사랑 없이 인간을 대해도 되는 것은 아니야.”
- 『부활 2』, p.259
처음 『부활』을 펼쳤을 때 제목을 종교적인 의미로 먼저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바카라을 읽고 나니 조금 달라졌습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만 부활일까요. 너무 익숙해서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을 의심하게 되는 것, 남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 원래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자리에서 한 발 빠져나오는 것도 부활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네흘류도프도 하루아침에 좋은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믿음이 갑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고, 주저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신이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 취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래도 이전과는 분명 달라졌습니다. 후회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카츄샤를 돕기 위해 직접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죄수들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을 찾아갑니다. 자신이 가진 토지와 재산도 전과 같은 눈으로 볼 수 없게 됩니다. 미안한 마음은 조금씩 행동이 됩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후회와 바카라임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후회는 마음속에만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카라임을 느끼면 결국 몸을 움직이게 됩니다.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대학에 가겠다고 버틴 한 번의 선택만으로 지금까지의 삶이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 뒤에도 선택할 일은 계속 생겼습니다.
공부를 계속할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
글을 쓸 것인가, 내일로 미룰 것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할 것인가, 익숙한 자리에 머물 것인가.
선 하나를 넘으면 끝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도 또 다른 선이 나타났습니다.
그때마다 대단히 용감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냥 해본 일이 많았습니다. 대학에 갔고, 공부했고, 아이들을 가르쳤고, 글을 썼고, 또다시 공부했습니다.
돌아보면 인생을 바꾼 것은 거창한 결심 몇 번이 아니라 “그래, 이번에도 한번 해보지 뭐” 했던 순간들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활』의 마지막 문장이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 이유입니다.
“이날 밤 이후 네흘류도프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그가 새로운 생활 조건 속으로 들어섰기 때문이라기보다 이때부터 일어난 모든 것이 그에게 이전과 완전히 다른 의미를 띠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이 새로운 시기가 어떻게 끝날지는 미래가 보여 줄 것이다.”
- 『부활 2』, p.446
여기에는 네흘류도프가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말도, 그의 삶이 성공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톨스토이는 그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는 미래가 보여 줄 것이라고 남겨 둡니다. 그 점이 좋았습니다. 사람의 변화는 어느 날 완성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과거를 지운 뒤 새 출발을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지만, 그 이후의 삶은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태어나 살아온 시대를 다시 고를 수는 없습니다. 딸에게 대학까지 갈 필요가 있느냐고 묻던 시절도 바꿀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시대가 정해 놓은 기준에 삶을 맞출 필요는 없었습니다.
『부활』을 덮고 제게 남은 문장은 이것입니다.
네흘류도프의 부활은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예전처럼 살 수 없게 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당연했던 것을 의심하게 되고, 외면했던 일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부활』을 “지금 시작해서 뭐 하겠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남들이 정해 놓은 자리를 오래도록 자기 자리라고 믿어 온 사람에게도 건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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