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랫동안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한 남자의 지독하고 순수한 순애보로 기억하곤 합니다. 5년 전 가난하다는 이유로 놓쳐버린 첫사랑을 잊지 못해, 거대한 저택을 사고 매일 밤 화려한 파티를 열며 건너편 초록 불빛을 바라보던 남자. 세상이 손가락질해도 오직 한 여자만을 향해 모든 것을 던졌던 낭만주의자의 비극. 과연 그 찬란한 수식어는 온전한 진실일까요?
그러나 바카라장을 더 넘기며 마주하는 실상은 그 아름다운 환상을 처참하게 부수어 버립니다. 개츠비 스스로가 하느님께 맹세까지 하며 자신의 화려한 과거를 털어놓지만, 그 눈물겨운 헌신의 대상인 데이지의 목소리 속에는 사실 사랑이 아니라 돈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게다가 데이지는 자신이 직접 몰던 자동차로 타인의 목숨을 앗아가는 참혹한 비극을 일으키고도 아무런 가바카라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녀와 남편 톰은 마치 물건을 부순 것처럼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뒤, 자신들의 막대한 돈과 무관심 뒤로 비겁하게 숨어버리는 구제불능의 속물들이었습니다.
이 추악한 진실 앞에서, 데이지라는 껍데기를 향한 개츠비의 집착이 과연 ‘위대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될 수 있을지 저는 깊은 의문을 품게 됩니다. 누구나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이 탐욕의 황무지를 바라보며 제가 느낀 생각은 세상의 통념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이 추악한 진실 앞에서, 데이지라는 껍데기를 향한 개츠비의 집착이 과연 ‘위대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될 수 있을지 깊은 의문을 품게 됩니다. 누구나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이 탐욕의 황무지를 바라보며 느낀 생각은 세상의 통념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본격적인 사유로 들어가기에 앞서, 이 비극의 무대를 설계한 작가와 이야기의 뼈대를 가볍게 짚어볼까 합니다.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 1896~1940)는 ‘재즈 시대(Jazz Age)’라는 광란의 시대를 가장 뜨겁게 살다 간 인물입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누린 전례 없는 경제적 호황과 물질만능주의의 그늘을 누구보다 예리하게 포착해 낸 그는, 화려한 상류슬롯 속에서 피어나는 허영과 정신적 타락을 자신의 삶과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여냈습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중서부 출신의 청년 닉 캐러웨이가 뉴욕 근교의 ‘웨스트에그’로 이웃해 오면서 시작됩니다. 그곳에는 매일 밤 정원에서 정체 모를 호화로운 파티를 여는 신흥 부자 제이 개츠비가 살고 있습니다. 알고 보니 개츠비는 5년 전 군 시절 사랑에 빠졌으나 가난 때문에 이뤄지지 못한 상류층 여성 데이지를 다시 만나기 위해 이 모든 판을 벌인 것입니다.
닉의 주선으로 개츠비와 데이지는 재회하지만, 데이지의 남편 톰의 폭로와 오해 속에서 비극이 싹틉니다. 결국 데이지가 몰던 차에 톰의 정부인 머틀이 치여 죽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톰의 이간질로 오해한 머틀의 남편 윌슨에게 개츠비는 자신의 수영장에서 비참하게 총격 살해당합니다. 그 수많은 파티에 버글거리던 사람들은 개츠비의 장례식장에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는 그가 되돌리고 싶은 것이 데이지를 사랑하는 데 들어간, 그 자신에 대한 어떤 관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59쪽)
제가 보기에 개츠비가 사랑했던 것은 입체적인 인간 데이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17세의 소년 시절부터 스스로 만들어낸 이상적인 이미지, 즉 ‘제이 개츠비’라는 허구의 세계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아온 인물입니다. 그에게 데이지는 자신이 상상해 온 부와 성공, 그리고 잃어버린 과거의 영광을 증명할 유일한 ‘성배’이자 완벽한 환상의 ‘화신’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카라 속 데이지의 고백처럼, 그녀는 톰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속물적 인간 그 자체였습니다. 그럼에도 개츠비는 데이지의 목소리에서 흘러나오는 탐욕의 소리를 외면한 채, 과거의 시간을 완벽하게 박제하여 현재로 되돌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순수가 아니라 지독한 ‘자기기만’입니다. 환상이라는 신기루를 실제라 믿고 맹목적으로 달려간 그의 모습은, 눈이 먼 채 절벽을 향해 달리는 기관차처럼 애처롭고 기괴하기만 합니다.
"톰과 데이지, 그들은 경솔한 인간들이었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부숴버리고 난 뒤 돈이나 엄청난 무관심 또는 자기들을 묶어주는 것이 무엇이든 그 뒤로 물러나서는 자기들이 만들어낸 쓰레기를 다른 사람들이 치우도록 하는 족속이었다." (252~253쪽)
작가가 그려낸 톰과 데이지의 세계는 차가운 자본이 지배하는 거대한 성벽입니다. 이들은 태생적인 부와 특권에 기대어 타인의 고통에는 눈을 감고, 삶을 한낱 소모품처럼 소비한 뒤 바카라임을 회피하는 ‘부주의한 족속’들입니다.
이러한 구제불능의 속물들 앞에서 개츠비의 낭만성은 너무나 무력하게 부서집니다. 개츠비가 정직한 노동이나 도덕이 아닌, 불법적인 부와 허위로 무장해 이 성벽을 넘으려 했다는 점은 뼈아픈 아이러니이긴 합니다.
결국 이 비극은 순수한 인간이 부도덕한 자본의 시스템에 편입되려다 어떻게 소비되고 버려지는지를 보여주는 잔인한 알레고리입니다. 속물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진심을 다하는 자는 언제나 가장 쉽게 소비되는 먹잇감일 뿐이니까요.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다. 그것은 우리를 피해 갔지만 별로 문제 될 것은 없다… 내일 우리는 좀 더 빨리 달릴 것이고 좀 더 멀리 팔을 뻗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맑게 갠 날 아침에……" (255쪽)
그렇다면 개츠비가 매일 밤 건너편 만(灣)을 향해 손을 뻗으며 바라보았던 ‘초록빛 불빛’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실체 없는 허상, 즉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헛된 아메리칸 드림의 신기루이자, 잃어버린 과거의 시간에 닿고자 하는 인간의 덧없는 낭만입니다.
불빛은 개츠비가 다가갈수록 매년 뒤로 물러나며, 결코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 불빛의 끝에 기다리고 있던 것은 구원이나 사랑이 아니라, 쓰레기 더미처럼 버려진 차가운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피츠제럴드가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한 냉소가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기꺼이 내일을 향해 더 빨리 달리고 팔을 뻗으려는 그 끈질긴 희망의 허우적거림—그것이야말로 작가가 정의한 진짜 ‘위대함’의 진짜 얼굴이 아닐까요.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위대함’이란 거대한 업적이나 흠 없는 도덕적 승리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피츠제럴드가 그린 개츠비의 위대함은 결코 눈부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핍과 허영으로 얼룩져 있고, 때로는 가여울 만큼 맹목적이며, 끝내 속물들의 폭력 앞에 무참히 짓밟힌 초라한 잔해에 가깝습니다.
누군가는 이 소설을 읽고 개츠비의 어리석음을 탓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카라을 덮는 순간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이유는, 개츠비의 모습에서 ‘불가능한 것을 갈망하는 우리 자신의 초상’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껍데기뿐인 허상임을 알면서도 누군가를, 혹은 어떤 꿈을 향해 온 마음을 던져본 적이 있으신가요? 세상의 계산적인 눈으로 보면 어리석고 흉측할지라도, 그 빛바랜 초록 불빛을 향해 끝내 팔을 뻗어 보았던 그 가엾은 미련, 그것이야말로, 이 건조하고 속물적인 세상을 버텨내게 만드는 우리들의 유일한 낭만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유의 폭을 넓히는 한 줄 요약 :
우리가 좇는 찬란한 환상은 어쩌면 속물적인 현실이 만들어낸 가장 서글픈 신기루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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