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음 달이면 퇴사한 지 2년째다. 시간이 빠르기도 하다.
무기력과 두려움이 삼켜버린 내 일상은 회피뿐.
서울에서 2주쯤 보내다 지겨워질 때쯤 본가로 가서 2주. 그렇게 어영부영 보내다 보면 한 달이 금방 지나간다. 고향집에 가면 하루가 더 빠르다. 엄마가 차려주시는 밥을 먹고 치우고, 먹고 치우고, 엄마가 틀어달라는 유튜브를 틀어주고 같이 보다 보면 하루가 그냥 지나간다.
서울에 있으면 혼자라서 외로웠고, 고향집에 내려가면 시간만 죽이니 갑갑하고 불안했다. 그런 패턴으로 몇 개월을 보내자 부모님도 나의 미래를 포기한 것 같았다.
같이 산바카라을 나갔던 아빠가 넌지시 떠보듯 이야기하셨다.
“내려온다고 하면 좀 더 큰 집으로 이사 가야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데? 그리고 내가 고향으로 내려간다 한들 부모님과 한집에 살 생각은 더더욱이 없다.
“엄마, 나 내일 서울 올라갈 거야”
“왜? 무슨 약속 있어?”
“아니. 나도 내 집에 가야지!”
아빠도 터미널까지 태워다주며 엄마와 똑같이 물었다.
“무슨 일 있어서 올라가는 거야?”
나는 엄마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답하였다. 큰일이다. 그런 인식을 심어주었다니...
서울로 향하는 고속버스 안의 고무와 플라스틱을 섞은 것 같은 냄새는 여전히 멀미를 유발했고, 평일 낮에도 여유가 없는 지하철. 질서 안의 무질서한 사람들을 거쳐 나의 집으로 돌아왔다.
2주간 묵은 집 냄새와 먼지. 다행히 말라 죽지 않은 화분들.
화분에 듬뿍 물을 주고, 세탁기와 청소기를 돌리고, 씻고 침대에 널브러지니 아… 자유다.
자유는 어찌 이리도 상대적인가?
그간 엄마 밥 먹고 충전하고 왔으니, 조금이라도 발전적인 삶을 살려고 활동을 시작했다.
교보문고에서 주최하는 고명환 작가 강연에 다녀왔다. 운 좋게 4년 연속 참석할 수 있었다. 일부는 이전에 들었던 내용도 있지만 매해 갈 때마다 새로운 깨달음이 추가되어 나타나신다. 2시간 남짓의 강연을 듣고 올 때마다 동기부여와 에너지를 얻고 온다.
강연장을 나와 광화문에서 시청역까지 걸으며 생각했다.
'그래. 내가 지금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바카라이라도 읽자!'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갑자기 생각난 바카라이 있었다.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이다. 오래전에 바카라을 샀건만 어려운 문장으로 되어있는 것도 아니고 두꺼운 바카라도 아닌데 잘 읽히지 않아 완독하지 못했던 바카라이다.
목차를 보고 끌리는 곳을 펼쳤다.
‘오직 현재’
어찌 된 일인지 술술 잘 읽혔다. 중간부터 읽다가 군데군데 읽다가 흐름을 느끼고 싶어서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전에는 독서를 하려면 ‘오늘은 5쪽이라도 읽어야지’ 하면서 자꾸만 페이지 숫자를 확인하곤 했다.
그런데 처음이었다. 페이지를 확인하지 않고 읽고 있는 내 모습.
말이 통하는, 그리고 나에게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어른을 만난 것 같아서 반갑고 든든했다. 친구들, 지인들은 각자 살기 바쁘다. 부모는 항상 안전한 길만 이야기한다. (고향집으로 다시 들어와라 같은…)
진심으로 고민하고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 뿐이다.
집에서 바카라을 읽자니 앉아도 누워도 불편했다. 카페 가는 것을 좋아하니 동네에 있는 여기저기 카페를 돌면서 바카라을 읽기로 했다.
다음 바카라은 무엇으로 할까 하다가 고명환 작가님이 강연에서 자주 언급했던 세네카가 궁금했다.
‘세네카, 오늘을 빼앗기고 있는 당신에게’ 바카라을 사 들고 주변 카페에 갔다. 이번에도 마음에 드는 목차부터 읽어보기로 했다.
'나중에라는 말이 삶을 삼킨다'
궁금하고 고민했던 내용들이었기에 금방 빠져들었다. 철학 바카라이라서 딱딱하고 어려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사람들은 철학이라 하면 세상살이와 동떨어진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치부하기도 하지만 수학, 과학, 예술의 근간이 되는 위대한 학문이라는 것을 다시금 상기하게 되었다.
2,000년 동안이나 잊히지 않고 전해진 말이라면 의심이 필요 없는 가치가 있다. 와닿는 문구가 너무 많아서 거의 다 줄을 칠 뻔했다. 통째로 필사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군더더기 없는 내용이었다.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 군중에 휩쓸리지 말고,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야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 나의 본성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무엇으로 나의 본성을 알 수 있을까?
- 오늘 나를 위한 시간을 얼마나 보냈는가?
바카라 귀퉁이에 질문을 써보고 답도 써보았다.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바카라을 읽으면서 기댈 곳이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외로움이 사라졌다. 바카라을 통해서 김영하 작가와도 세네카와도 마주 앉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동안 바카라은 읽지 않고 쓰는 것만 좋아하던 이기적인 글쓰기를 오랫동안 했다. 부끄러워서 얼굴이 화끈거린다.
세네카를 다 읽고, 다음 바카라은 고명환 작가님이 강연에서 언급했던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와 ‘그리스인 조르바’를 골랐다. 집이 좁아서 바카라을 사는 것도 부피가 부담되어 일단은 전자바카라으로 구매했다. 추천하는 바카라들을 읽어보면서 나의 취향을 찾을 생각이다.
길을 잃었던 나는 일단 바카라을 읽어보기로 했다. 조금씩 내면이 채워지는 느낌이 즐겁다. 이러다 보면 나도 무언가를 결정하고 움직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어쩌면 막연한 기대. 하지만 확신이다.
조바심 내지 않고, 나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 값지다. 회사에 다니지 않는다고, 돈을 벌고 있지 않다고 자신을 깎아내리고, 비판할 필요가 없었다.
얼마 전 IT 업계에 있는 지인을 만났다. 나는 오랫동안 금융권에서 웹, 앱, 모바일 등 디지털 채널을 운영하던 디자이너였다. 쉬는 동안 ‘디자인 업계로 돌아가야 하나? 돌아갈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안고 있었다.
업계를 떠나있는 동안 몰랐던 신랄한 업계 현실을 들었다. 일감이 확 줄어들었고, 회사도 어려워져 대대적인 인원 감축까지 했다고 했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마저도 앞으로 AI로 유지할 수 있도록 적용하는 것이란다. 그야말로 양날의 검이다. 더 이상 프로젝트 의뢰가 없어질 일인데 할 수밖에 없는, 스스로 문을 닫고 나오는 일이었다.
지인을 만나고 와서 고민하던 마음이 선명해졌다.
‘다시 회사에 들어간다 한들 겨우 몇 년이구나’
결국은 다음 스텝을 찾아야 하는 순간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
예전에 봤던 전시가 생각났다. 개화기 시절 신여성에 대한 전시였는데 자수 작품들이 인상적이었다. 해방 이후부터 80년대 초까지 대학에 자수과가 있었다고 한다. 시대가 변하면서 그것이 섬유예술과가 되었다는 흥미로운 사실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때는 이불도, 옷도 직접 지어 입을 일이 많을 때이니 자수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생활에 밀접했겠는가? 시대의 변화로 사라졌듯 IT 업계에서의 디자이너의 미래도 그런 것이 아닐까?
아니. 이미 현실이다.
마침, 시간 부자인 나는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 많다. 다행히 주식 투자도 코스피가 광적으로 오르기 전에 투자하고 보유하고 있었던 덕에 퇴사할 때랑 비교해서 자산이 줄지 않고 심지어 늘었다. (물론 팔아야 돈이지만) 2년간 썼던 생활비까지 감안하면 꽤 나쁘지 않은 수익이다. 이렇게 보니 다음 스텝을 정하라고 신이 판을 깔아주신 것 같다. 나 정말 엄청난 행운아구나!
‘세네카, 오늘을 빼앗기고 있는 당신에게’에서 가장 멍하게 했던 한 줄.
당신은 지금, 살고 있는가.
휩쓸리지 않고 깨어있어야 한다. 예전처럼 쉽게 무기력해지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