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랑의 모란길에서 되살아난 여고의 추억
여고 선후배 봉사단체인 지초봉사 회원 26명이 강진으로 야유회를 떠났다.
목적지는 백운동 원림과 영랑 생가이다. 마침 강진군에서는 반값여행 행사를 진행하고 있어 여행객들에게 강진사랑상품권을 되돌려주는 반가운 혜택도 기다리고 있었다.
10년 이상의 나이 차를 뛰어넘어 선배와 후배가 한 버스에 올랐다. 익산에서 강진까지는 두 시간 정도 걸린다. 짧지 않은 거리였지만, 버스 안에서는 시간보다 추억이 먼저 달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하얀 운동화 기억나?" 하고 말을 꺼내자 차 안은 금세 1970년대 여고 교실이 되었다.
그 시절 우리는 숙배치마에 하얀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도시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의 운동화는 아침마다 눈처럼 희었지만, 시골에서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먼 길을 걸어온 학생들의 운동화는 늘 흙먼지로 얼룩졌다. 비 오는 날이면 운동화를 가방 속에 고이 넣어 두었다가 교실에 들어와서야 꺼내 신곤 했다. 한 선배님은 친구들 운동화처럼 하얗게 보이고 싶어 백묵가루를 운동화에 문질렀던 이야기를 꺼내 모두를 웃게 만들었다.
추억은 자연스럽게 1977년 11월 11일의 그날로 이어졌다.
이리역 폭발사고.
당시 여고의 유리창은 대부분 깨졌고 학생들의 자랑이었던 생활관도 무너졌다. 선배님은 깨진 창문에 종이를 덧대어 찬바람을 막고 수업을 이어갔던 기억을 생생히 떠올렸다. 반세기가 가까이 흘렀지만, 그날의 충격은 여전히 마음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한 선배님은 평생 잊지 못할 결석과 담임 선생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3년 개근을 못하고 단 하루 결석했던 날이다. 성적표에 부모님의 도장을 받아 제출하던 시절이다. 분명히 제출했던 성적표가 담임선생님의 바카라상 위에서 사라졌다. 선배님은 집에서 성적표를 그려 제출하기 위해 결석을 했다. 그런데 다음 날 담임선생님은 "성적표를 찾았다. 미안하다."라고 정중히 사과하셨다고 한다.
그 한마디는 선배님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남겼고, 훗날 그녀가 교사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또 다른 노선배님은 교장실의 추억을 들려주었다.
당시 교장실은 학생들이 쉽게 드나들 수 없는 엄숙한 공간이었다.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교장실로 불려 갔다. 혹시 혼나는 것은 아닐까 긴장했지만, 교장선생님은 의외의 부탁을 하셨다.
"너희들이 바느질을 잘한다면서?"
그리고는 교장실 커튼을 꿰매 달라고 부탁하셨다. 선배님들은 친구들과 함께 이틀 동안 정성껏 바느질하며 교장실 커튼을 완성했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성당면에서 통학하던 선배님의 이야기도 이어졌다.
집에서 40분 넘게 걸어 나와 버스를 타야 학교에 도착할 수 있는 먼 길이었다. 토요일 4교시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는 어느 날, 친구들은 버스비를 아껴 15원짜리 라면땅을 사 먹으며 걸어가자고 제안했다. 버스를 타면 20분이면 갈 길을 한 시간이 넘도록 걸으며 먹었던 라면땅의 맛은, 아마 지금의 어떤 고급 음식보다 더 달콤했을 것이다.
임피 에서 기차로 통학하던 선배님의 사연은 더욱 뭉클했다.
형편이 어려워 새 교복을 마련하지 못해 언니가 입던 누렇게 바랜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아침 기차는 학생들로 가득 찼고, 가방 속 도시락에서는 고구마순 김치 국물이 새어 나와 바카라과 공바카라을 붉게 물들였다. 새 공바카라 한 권도 귀하던 시절, 3학년 때 받은 선행상 상품인 노트 두 권은 지금도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했다.
송학동 굴다리 이야기도 빠질 수 없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굴다리에는 무릎까지 물이 찼다. 운동화가 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비 오는 날, 같은 동네 남학생들이 담벼락에 기대어 손을 내밀어 주었고, 선배님은 그 손을 잡고 물을 건넜다. 수십 년 뒤 다시 만난 그 남학생은 "그때 내가 네 손 많이 잡아줬다"라고 웃으며 말했단다.
누군가는 학교 50주년 기념행사를 이야기했고, 또 다른 선배님은 야간 자율학습을 몰래 빠져나와 영화를 보러 갔다가 복도 청소를 했던 추억을 들려주었다.
추억은 끝이 없었다.
신기하게도 사람은 같은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과 만나면 나이를 잊는다.
버스 안의 스물여섯 명은 어느새 칠순을 바라보는 어른들이 아니었다.
교실 창가에 앉아 친구와 수다를 떨고, 쉬는 시간마다 운동장을 뛰어다니고, 시험이 끝나면 깔깔거리며 웃던 열일곱 소녀들이었다.
그렇게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강진에 도착했다.
강진은 월출산 남쪽 자락에 자리한 고장이다. 산과 들, 계곡과 바다가 어우러진 남도의 풍요로운 자연환경을 품고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하며 수많은 저술을 남긴 곳이기도 하다.
우리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백운동 원림이었다.
백운동 원림은 월출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계곡을 이루며 만들어낸 별서정원이다. 조선 후기 선비들이 자연 속에서 학문과 풍류를 즐기던 공간으로, 우리나라 3대 민간정원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맑은 물소리와 울창한 숲, 바위와 정자가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한 폭의 산수화 같았다. 월출산 자락을 타고 내려온 물길은 정원을 적시고, 숲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한여름의 더위마저 잊게 했다.
이어 찾은 곳은 영랑생가였다.
강진은 한국 현대 서정시를 대표하는 시인 영랑의 고향이다. 생가 마당에 들어서니 남도의 햇살과 바람이 영랑의 시처럼 부드럽게 다가왔다.
영랑은 자연을 노래했지만 사실은 사람의 마음을 노래한 시인이었다.
모란은 이미 꽃철이 지나 있었지만 시인의 시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문득 버스 안에서 들었던 선배님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얀 운동화, 라면땅, 비둘기호 기차, 굴다리, 김치국물이 스며든 공바카라, 교장실 커튼, 그리고 친구들의 웃음소리.
모란은 해마다 지고 다시 피지만 사람의 청춘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조금 달랐다.
버스 안에서 추억을 꺼내는 순간 우리는 다시 여고생이 되었고, 백운동 원림의 숲길을 걸으며 다시 소녀처럼 웃었으며, 영랑의 시를 떠올리며 다시 열일곱의 마음을 만날 수 있었다.
강진 여행은 단순히 풍경을 보는 여행이 아니었다.
백운동 원림의 계곡물은 월출산에서 흘러와 숲을 적시고, 영랑의 시는 세월을 건너 오늘의 우리 마음을 적셨다.
그리고 버스 안에 울려 퍼지던 선배님들의 웃음소리는 반세기의 시간을 거슬러 우리를 다시 교실 창가로 데려다 놓았다.
돌아오는 길, 창밖으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들녘 위로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그 햇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마음속에는 저마다 지지 않는 모란 한 송이를 품고 살아간다는 것을.
그날 강진에서 만난 것은 백운동 원림의 풍경과 영랑의 시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오래전 교실 창가에 두고 온 열일곱의 봄을 다시 만나고 있었다.